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서울지검의 95년7월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93명이다. 민간인이 166명, 군인23명, 경찰관 4명이다. 1982년3월15일에 육군본부가 작성한 “계엄사”375쪽에는 사망이 189명, 이 중 군인이 23, 경찰이 4, 민간인이 162명으로 집계돼 있다. 검찰 발표에 민간인 4명이 더 추가된 것이다. 군인 사망자 23명 중 12명은 부대 상호간의 오인사격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시민군으로부터 총을 맞아 사망한 군인은 11명인 것이다.

날짜별 사망자 통계는 이러했다. 5월18일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5월19일에는 노동자 및 양화점 점원 2명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20일에는 7명, M-16 1명, 카빈 2명, 타박상 4명이다. 5월21일에는 61명, 카빈총 16명, M16 30명이었고 나머지 15명의 대부분은 타박상이고, 일부 기타 총상 및 자상이 있었다. 5월22일에는 29명, 차량사 5명, 카빈 5명, M16 16명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기타총상이다. 5월23일에는 20명, M16 14명, 카빈 1명, 타박 2명, 기타총상 3명이다. 5월24일에는 12명, M16 8명, 카빈 1명, 타박1명, 자상1명, 기타총상 1명이다. 5월25일에는 사망자가 없었고, 5월26일에 타박상 1명이 발생했다. 마지막 날인 5월27일에는 26명, M16이 22명, 카빈1명, 자상1명(윤상원), 기타총상2명이다.

카빈총 사망자를 날자 차례 별로 보면 0. 0. 2,16,5,1,1,1,0,0,1이고, M16 사망자를 날짜 차례별로 보면 0,0,1,30,16,14,8,0,0,22이다. 시내격전이 가장 치열했던 21일에 시민은 M16에 의해 30명, 카빈에 의해 16명이 사망했다. 시민군 총에 시민이 맞아 사망한 것이다. 5월21일은 양측 모두 이성을 잃고 감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이며, 군이 30명의 시민을 쏘는 동안 시민군도 16명의 시민을 쏘았다. 또한 5월21일에는 몇 정의 M16이 이미 파탈되어 있어 M16 사망자 모두를 군에 전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날 시민들은 61구의 시체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20% 이상은 차량사고에 의한 사망한 사람과 시민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체 기간 중 차량사는 12명, 카빈사는 26명이다. 이38명(23%)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군이 책임질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엄군이 시내를 완전히 떠나 있었던 5월22일부터 26일 사이에 발생한 사망자 61명(37%)은 주로 시민군이 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이 37%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시민군이 져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과 판단이 끼어들 수 없는 급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 총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 위험한 작전지역에 나타나면 누구나 총구에 의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5월24일(토) 09:55분, 호남도로 광주인터체인지(IC) 부근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2/29)이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고속도로로 진행하던 중 이를 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오인사격을 가하여 96연대 소속 사병 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오후 효천역 부근에서는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병력이 이동 중에 있던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미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고, 이에 63대대가 응사를 하는 과정에서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듯 전쟁터에 배치된 총구는 한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는 말은 성립해도 계엄군이 일부러 광주시민만을 골라서 쏘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5월22일부터 26일에 걸쳐 시민군이 외곽으로 쫓겨난 계엄군을 일부러 쫓아가서 총으로 공격하다가 피해를 입은 이 61명에다 차량사 및 카빈사 38명을 보태면 99명(60%)이 된다. 전체 사망자의 60%에 대해서는 성격상 그 책임이 명백하게 시민군에 있어 보인다. 여기에 기타총상이 9명도 보태야 할 것이다. 기타총상이란 시민군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AR기관총, CAL50 기관총, M1소총 등 다양한 종류의 화기들이다. 계엄군에겐오직 M16만 있었다. 기타총상을 여기에 더 보태면 군이 책임질 수 없는 죽음이 108명(66%)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 108명의 죽음에 대해 계엄군은 억울한 누명을 써온 것이다.

진압 직후의 계엄사 발표로는 교도소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이 28명, 부상자가 70명이라 했다. 계엄사측은 또“시내버스, 군경 차량 등을 마구 탈취한 폭도들이 시위를 선동하는 과정, 무기탈취를 위해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음주운전 및 과속운전 등으로 인한 전복이나 충돌하는 과정에서 3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탈취한 소총, 수류탄 등 무기류 취급 미숙으로 인해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라남도 인들을 위해 계엄군이 지켜주던 도청 그리고 전남대로부터 살인적인 공격을 받다가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병력을 향해 총격을 가하다가 사망한 무장시위대들에 대해서도 계엄군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군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피해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필자는 80% 이상의 사망자들에 대해서는 성격상 그 책임을 군에 물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하게 피해를 본 시민들도 많이 발견된다. 이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계엄군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44개월간 참전했던 필자로서는 시각이 좀 다르다. 누구나 전쟁터 가까이에 가면 유탄을 맞게 되고, 오해를 받아 피해를 보게 되어있다. 전투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신원을 조사할 틈이 없다. 전투를 탓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 낸 병사들에게 대해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필자가 광주시민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주유소에서는 묻지 않고 휘발유를 주었기 때문에 어느 한 광주시민이 타이탄 트럭으로 휘발유를 네 번째 집으로 가져 가다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총탄에 맞아 숨졌다고 한다. 그의 유족 역시 보상금을 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총알아 날아다니는 혼란기에는 억울한 사연들이 무수하고 다양하게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책임은 충돌 자체에 있는 것이다.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검찰과 법원과 그리고 이른바 5.18정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장본인이 전두환과 정호용 등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김대중, 복학생들, 재야세력, 유언비어를 퍼트린 세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광주시에서 계엄군을 잘못 지휘한 윤흥정과 정웅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의 주장에 동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독자의 몫인 것이다.

여기에서 숫자가 틀리고 맞는 것은 둘째 문제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계엄군과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피해를 전부 계엄군이 다 뒤집어 써왔다는 사실, 계엄군이 수세적 방자였고 시위군이 적극적 공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계엄군이 처음부터 광주시민을 싹쓸이 하려고 무자비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매도되어 온 사실, 그리고 카빈소총 등으로 시민들을 쏘아죽인 사람들에 대한 정체에 대한 것이다.

언론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광주학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망자 수는 결코 한쪽 만에서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충돌과 쌍방교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부상자 수를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 진다. 민간인 부상자 수는 377명, 군인 부상자수는 117명, 경찰 부상자수는 148명이다. 군경을 합치면 265명이다. 부상자 수의 비율은 민간 대 군경이 1.4: 1인 것이다. 쌍방이 엇비슷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군경이 일방적으로 시민을 공격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숙제로 남는 것은 사망한 사람 중 12명(95년 검찰조사)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5.18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중 상당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 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으며, 또한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소총 등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뒤에서 쏜 조직적인 세력이 바로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아닐까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만을 쏘았다고 믿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오발사고도 더러 있었지만 이는 극히 소수였다. 시민군 총에 의해 사망한 시민은 계엄사 발표가 88명, 95년 검찰 발표가 35명이다.

한편 23명의 계엄군 사망자는 5월20일에 1명,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명,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19일 시위대는 차량으로 경찰 4명을 현장에서 깔아죽였다. 20일 계엄군 전사자는 3여단 16대대의 정관철 중사로 시위대 차량에 깔려 즉사했다. 그는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고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다. 21일 및 22일의 전사자 6명은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의 사격을 받아 발생했고, 24일의 11명은 교도대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전사자는 광주시 재탈환작전에서 발생했다.

2008.11.11.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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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코리아 http://www.allinkorea.net/200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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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묘역 만든 단체 대표가 인권委 위원

노무현 법무비서관이 現職,

부산 실천연대 대표는 前職 위원

김성욱 정치평론가


촛불난동(亂動)을 비호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委)」에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현직 의장 및 노무현 정권 법무비서관 출신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1. 정재근 위원

인권委 위원인 정재근(법명 법안)씨는 現職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의장이다. 실천승가회는 7월4일 서울 시청 광장에서 소위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촉구하는 시국법회」를 주도하는 등 소위 李明博 정부의 종교차별을 전면에서 규탄하고 있다.

실천승가회는 98년 6월 「비전향장기수후원회」, 99년 9월 「국보법반대국민연대」, 2001년 3월 친북(親北)단체인 「통일연대」, 2005년 2월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汎국민대책위원회(평택범대위)」등에 참여했었다.

실천승가회는 2005년 5월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에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이라는 이름의 간첩·빨치산 묘역(墓域)을 조성했다.

묘역의 비석엔 남파간첩을 『의사(義士)』, 빨치산출신을 『애국통일열사』로 표현하며 『애국통일열사 정순덕 선생.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등의 비문(碑文)을 새겨 넣었다.

간첩·빨치산 추모공원 조성사실이 알려진 후 HID동지회 등이 비석을 파기하자, 승가회 사무국장은 『民主主義에 기여한 비전향장기수들의 묘역에 대해 보수단체가 색깔시비를 걸고 있다(2005년 12월3일「민중의 소리」 인터뷰)』고 주장했었다.

정 씨는 2006년 2월28일 소위 종교단체 대표자 발표문을 통해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공동선언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법정비가 이뤄지길 바란다』며 특히 『남측의 국가보안법을 들어 남측이 헌법과 법률에 남아있는 냉전적 요소들을 정비하는 일에 먼저 앞장설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황덕남 위원

인권委 위원인 황덕남씨는 2003년 2월부터 2003월 8월까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으로 재직하며, 노무현氏의 법률자문을 담당했었다. 그는 유남영, 조국 위원과 함께 지난 해 대선 직후인 12월23일 임명됐다.

3. 최경숙 위원

인권委 위원인 최경숙씨는 부산여성장애인연대 대표 출신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이라크파병 반대 등을 주장해왔다.

그는 2004년 10월6일 부산 서면 롯데백화점 앞에서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부산女性선언자대회」를 주도했다.

최 씨가 낭독한 선언문은 『국가보안법은 지난 56년간 냉전과 분단의 상징으로, 역대 독재자들은 남과 북의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국민의 사상·양심·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침해했다』며 『우리 부산지역 여성들은 부분개정론, 대체입법론, 폐지 후 형법개정론 모두 반대』한 뒤 『국가보안법의 완전폐지』를 주장했다.

최 씨는 2003년 10월9일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여성 1000인 평화선언」에 참가했고, 같은 해 11월13일에는 「부산지역 이라크 파병결정 철회 300인 선언」에 참가했다.

후자는 『미국의 추가파병요구가 침략전쟁에의 동참을 강요하는 파렴치한 전쟁공모행위이자, 불평등한 韓美관계를 활용하여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려는 추악한 내정간섭행위임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주장했다.

4. 유남영·윤기원 위원

인권委 위원인 유남영氏와 윤기원氏는 모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民辯)」 간부출신이다. 유남영 위원은 전북 남원 출신으로 서울 법대와 워싱턴주립대를 나왔고, 윤기원 위원은 서울 출신으로 서울 법대와 同대학원을 나왔다.

民辯은 「국보법폐지국민연대」,「평택범대위」 등에 참여해 온 左派성향 변호사 조직이다.

民辯은 송두율 구속 당시 『제2, 제3의 송두율 교수와 같은 국가보안법의 피해자가 양산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과 검찰 공안부를 폐지하여야 한다.(2004.7.21. 성명 中)』는 등 비호했었다.

5. 조국 위원

인권委 위원인 조국氏는 한총련 구속자 석방 등을 주장했던 「양심수석방300人선언(2002.8.10),「송두율석방시민사회1000人선언(2003.10.23)」,「국보법폐지촉구全國교수1000人선언(2004.10.27)」 등에 참여해왔다.

조 씨는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부소장(2000~2002),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2002~2005), 민보상위 자문위원(2000~2001), 등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참여연대는 「국보법폐지국민연대」, 「평택범대위」 등에 참여했었다.

6. 김칠준 사무총장

인권委 사무총장인 김칠준氏는 경기복지시민연대 공동대표, 참여연대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김 씨는 2004년 12월12일 서울 경희대에서 「부시·블레어·노무현 등의 이라크전쟁범죄와 파병에 대한 민중법정」의 소위 기소대리인으로 나섰다.

당시 김 씨는 『부시, 블레어에게는 전쟁범죄의 책임,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공범의 책임이 있다』며 『소멸시효배제를 선언하는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반드시 피고인들의 생이 다하기 전에는 집행할 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7. 원형은 위원

촛불난동 중인 5월31일까지 재직했던 인권委 위원 원형은氏는 최근 이적단체로 기소가 된 실천연대의 부산지부인 「6·15공동선언 釜山실천연대」 공동대표 맡았다.

원 씨는 한총련 합법화 및 구속자 석방을 주장했던 「한총련합법화1000人선언(2002.7.19)」, 「한총련합법화宗敎人1000人선언(2002.7.18)」, 「양심수석방300人선언(2002.8.10)」,「양심수석방各界인사기자회견(2003.4.8)」 등에 참여했었다.

원 씨는 「국가보안법폐지 釜山연대」 공동대표, , 「釜山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정평)」 회장 등도 맡고 있다. 목정평은 親北단체인 「통일연대」 및 「국보법폐지국민연대」 ,「평택범대위」 등에 참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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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파주 보광사 통일애국열사묘역 조성

필자는 2005년 11월18일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보광사를 찾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빨치산묘지」를 찾아 의정부로 향했다 파주시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초행이라 버스와 택시를 서 너 번갈아타고 도착한 보광사는 신라시대 유흔(遺痕)이 남아있는 千年 古刹이었다. 사찰로 오르던 중 커다란 석조(石彫) 안내석이 눈에 들어왔다.

「불굴의 투사 통일애국투사묘역 연화공원」

이 공원에는 남파간첩으로 알려진 금재성, 최남규와 빨치산 출신 류낙진, 정순덕, 손윤규, 정대철 등 비전향장기수 6명의 유해가 비석과 함께 안치돼있었다. 묘역은 실천불교승가회(대표 효림, 성관)가 2005년 5월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 내 공원형태로 조성한 것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碑文)은 남파간첩에 대해「의사(義士)」, 빨치산출신에 대해「애국통일열사」라 부르며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애국통일열사 정순덕 선생.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 하나 된 조국 산천의 봄꽃으로 돌아오소서』

『애국통일열사 류낙진 선생. 민족자주조국통일의 한길에 평생을 바치신 선생님, 우리민족사에 영원히 빛나리』

『애국통일열사 손윤규 선생. 조국통일을 위해 투쟁하시다가 비전향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친 열사 여기에 잠들다』

『의사(義士) 故 최남규 선생. 해방 후 청진 교원대학 지리학교수로 교육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57년 구속되어 29년의 감옥생활에서 지조를 지켜내신 민중의 벗. 『백두』옹 여기에 잠들다』

『의사(義士) 故 금재성 선생. 일제강점 하 민족해방투쟁으로 3년의 소년 옥과 해방 후에는 조국통일을 위해 57년 투옥되어 30년의 형옥 속에서도 전향을 하지 않고 당신의 지조를 지키며 빛나는 생을 마치다.』

<「통일애국열사묘역」에 묻힌 간첩·빨치산들 면면(面面)>

▲류락진(2005년 4월 사망) - 죽는 날까지 大韓民國 파괴활동 매진(?)


연화공원에 안장된 금재성, 최남규, 류낙진, 정순덕, 손윤규, 정대철 등은 비전향장기수로 북한에 대한 충성을 바꾸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류락진은 6.25사변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57년 가석방된 후 63년 「혁신정당」사건으로 구속돼 67년 석방됐고, 71년 다시「호남통혁당재건委」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8년 가석방됐다. 출소 후 운동권을 상대로 빨치산 강연을 벌여 온 류낙진은 94년「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돼 8년형을 선고받고 99년 광복절특사로 석방됐다. 93년 1월 조직된 구국전위는 「조선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조직으로서 창립선언문과 강령 및 규약에서 북한의 主體思想을 조직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규약 중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구국전위는 위대한 金日成 동지께서 창시하시고 친애하는 지도자 金正日 동지께서 발전 풍부화시켜 오신 새로운 노동계급의 혁명적 세계관이며 남반부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완수의 가장 정확한 학설인 主體思想을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삼는 주체(主體)형의 金日成주의 지하조직이다』

류낙진의 反국가활동은 99년 석방 이후에도 죽는 날까지 계속됐다. 그는 2002년 백운산지구 빨치산위령비 비문(碑文)작성 사건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류낙진은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2005년 사망하는데, 그의 가족들은 부의금 5천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했다.

▲최남규(1999년 사망); 『백두산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전향 거부

스스로 『백두산 장군(金正日)에 대한 충성』 때문에 전향하지 않았다고 밝힌 최남규는 1912년 함경북도 명천 태생으로 청진대학 지리학 교수로 재직 중 57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그는 남파후 서울서 간첩활동을 벌이다 57년 9월12일 동료 공작원의 밀고로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고 73년 만기출소했다.

최남규는 출소 후 3년 간 엿장수 생활을 하다 75년 7월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돼 89년 풀려났다. 그는 출소 직전인 89년 5월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그날 그때가 올 때까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고픈 내 고향에 가고파도 내 못가네. 광복된 이 조국에 38선 웬 말인가 이 땅 뉘 땅인데 주인행세 누가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짓밟질랑 말고서 돌아가라, 사라져라, 어서 꺼져버려라. 고-홈 고-홈 양키 고 홈』

▲정순덕(2004년 사망); 63년 체포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25사변 발발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1951년 스스로 빨치산이 됐다.

정순덕은 국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쫓겨 가 빨치산 활동을 지속하다 63년 11월 체포됐다. 이후 정순덕은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 간 복역하다 1985년 8월 가석방됐다.

정순덕은 지난 2003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왜 북한에 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전향서를 썼다고 하지만, 강제로 한 거니까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금재성(1998년 사망) 인민군 제대 후 간첩으로 남파

1924년 충남 대전 출생인 금재성은 보통학교 졸업 후 원산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44년 금촌 소년 형무소에 투옥됐다. 금재성은 출소 후 45년 공산당에 입당해 독찰대(헌병) 원산지구 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6.25사변 발발과 함께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정전(停戰) 후 제대해 원산 주을전기전문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중 56년 정치공작원으로 남파돼 고향인 대전에서 간첩활동을 벌였다. 그는 이듬해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고 72년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손윤규(1976년 사망) 빨치산 활동하다 사형 받아

전북 부안 태생의 손윤규는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6.25사변 당시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55년 경찰특무대에 구속돼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76년 옥사(獄死)했다.

「간첩`빨치산 통일애국투사 묘역 조성」보도가 2005년 11월19일 미래한국신문과 코나스 등에 실리고 이어 조선일보 등이 이를 이슈화하면서 한나라당과 시민단체들의 규탄이 잇따랐다.

급기야 2005년 12월5일 오전 11시경 H.I.D출신인 10여 명의 청년들은 묘역 내「의사(義士)」와 「애국통일열사」로 새겨놓은 비석들을 해머 등을 동원해 철거했다.

「전국연합」 등은 2005년 12월9일 HID의 묘비 철거에 대해 『천인 공로할 만행』이라며 기자회견을 가졌다.

북한의 對南선전매체 반제민전(舊 한민전)도 같은 날 『인간쓰레기들의 극악한 야만행위』라며 비난에 나섰다.

반제민전은 이날 논평을 통해 『비전향장기수들로 말하면 생의 마지막까지 통일애국의 지조를 지켜 싸운 민족의 장한 아들들이며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들이다』며 『살아생전 쇠고랑을 채우고 가혹한 죽음을 강요한 장본인들과 그 후예들의 기가 살아 통일애국투사들의 고귀한 넋을 함부로 모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성욱 정치평론가 : http://www.freedomfighter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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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코리아 http://www.allinkorea.net/200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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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 차원의 우주개발 필요”

'단순히 산업용 아닌 군사적 활용 가능한 위성개발 등'

▲ 공군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시대의 항공우주정보력과 군 창조경영' 학술회의. ⓒkonas.net


‘연세대 BK-21사업단’ 주최로 『아시아 태평양시대의 항공우주정보력과 군 창조경영』이란 주제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23일 공군회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는 김은기 공군참모총장, 국회 국방위원장인 김학송 의원(한나라당)이 참석해 각각 환영사 및 축사를 했다.

이날 토론자들은 저마다 ‘미래의 전쟁에 대비한 우주(宇宙)의 군사적 활용 필요성’을 역설했다.

장영근 한국항공대 교수는 “평화유지군 파병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입장에서 확장된 전장(Battle Field)에 대한 정찰정보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것을 독자적인 감시정찰위성을 이용해 탈피(독자 안보능력 증진)해야 한다”며, 우주자산이 “지상의 군 작전운용에 결정적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국방부)가 승인한 범 국가차원의 우주계획이 아닌 아직 공군의 원론적 우주계획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위성개발의 경우를 예로 들며 “‘운용개념’ 분석 없이 (단순히) 군의 감시정찰 능력을 증대한다는 논리”로 개발을 추진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특정 표적이나 지역을 어느 시기에 어떤 주기로 어느 정도의 정밀도로 어떤 형상의 영상을 촬영할지에 대한 명확한 소요에 의한 (개발) 근거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장 교수는 우주에서 얻은 첩보를 “공군작전은 물론 합동작전 그리고 연합작전의 지원”에 활용해야 하며, “국가 위기상황 발생시 혹은 국익을 위해 위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군사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위성 지상 통제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신보현 예비역 공군소장도 “한국은 국가안보차원의 우주전략확보 추진이 미흡하다”며, 군사용 보다는 “산업 육성위주”의 우주개발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군의 우주전력 활용 및 필요성”을 피력한 그는, “대북 및 불특정 위협에 대비, 최소 적정수준의 첨단전력확보 차원”에서라도 우주전력 건설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김득환 예비역 공군소장은 “비행환경이 점차 열악해짐(공군 비행장 및 사격장 주변 소음민원 등)에 따라 보다 진취적 해결방안 모색이 필요하다”며, 한국 공군의 비행훈련을 해외민간에 위탁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Konas.net)

김남균 코나스 객원기자(hile3@hanmail.net)


[코나스넷 http://www.konas.net/2008.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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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뇌졸중說에 대한 의사의 진단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있는 老年의 환자는 회복이 어렵다.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한 有名의사와 통화하는 김에 김정일의 뇌졸중說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는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說이 사실이란 전제하에 이렇게 말했다.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증세를 가진 老年의 환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까지 받았다면 회복이 어렵다고 봐야 한다. 특히 당뇨병이 있으면 회복이 더디다.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고 재발하면 끝이다. 이런 사람은 조심한다고 病床에 누워 있으면 상태가 더 악화된다. 그렇다고 운동도 할 수 없으니 딜레머이다."

미국의 對北 정보소식통은 뇌졸중說이 보도된 직후 "우리는 머지 않아 그에 관하여 또 다른 뉴스를 듣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재발 가능성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몸 상태에 관한 한 미국 정보기관과 국정원의 판단이 거의 일치한다. 對北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독립신문 http://www.independent.co.kr/ 2008.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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