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만 있는 희귀한 인간, '발딱선생'

학교마다 똬리를 틀고 교장에게 싸움 거는 발딱선생들



전교조 교사들이 학교 안에서 벌인 패륜적이고 정신병적 현상에 대한 현장 교장의 보고

나는 지난 십여년 동안 학교에서 희한한 현상을 목도해왔다. 어느 선생이 직원모임 때 갑자기 발딱 일어서서 회의와 관련이 없는 내용을 가지고 질문의 대상을 지적도 하지 않고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는다. 처음에는 듣는 사람들은 황당하기도 하고 상황논리가 조금 서는 것 같기도 하여 가만히 들어본다. 조금만 들어보면 학교의 기강을 파괴하려고 교장을 공격한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짓이 아니다. '발딱 선생'은 마치 왜정(倭政) 때 조선인을 괴롭힌 왜놈 앞잡이와 너무나 똑같다.

이 때 교장들은 대응하자니 창피하기도 하고 참아주면 다음에 잘 봐줄까(?)싶어 누구나 참는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제지할 수 없어 가만히 있게 되고, 어떤 사람은 마음 속으로 동지애가 발동하여 쾌감을 느낄지 모른다. 이 때부터 그 학교는 망하기 시작한다. '발딱선생' 짓이 학교를 가장 단기간에 망치는 악랄한 핵폭탄급 수법이다. 학부모들은 설마 이런 일들이 학교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고, 내 자식은 잘 되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를 하지만, 이 학교에는 학습지도와 생활지도는 사실상 끝장이 난 것이다.

이 발딱선생들이 한국교육을 망친 주범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평교사였을 때에도 가끔 보았고, 교감 때부터는 그러한 행위들을 심각하게 목도해왔다. 내가 평교사일 때에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감선생님에게 대드는 선생을 제지했고, 한 중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에게 막가파식으로 싸움을 걸어올 때 내가 가로챘다. 내가 그 싸움을 가로채야 하는 이유는 “발딱선생이 교장선생님을 저렇게 무시하는데 교감이 무슨 체통을 지키려고 보고만 있겠느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장의 존재를 부정하고 아침에 정면으로 만나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전문직관과 성직자관을 가져야 하는 교사가 과연 이래도 되겠는가! 그의 이념 속에는 철저한 노-사관계라는 적대적인 구도 하에서 교장에게 시비를 걸고, 교장을 난처하게 하려고 직원모임 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민주적 노사관계를 실천하는 기본강령으로 세뇌되어 있다. 그러나 교장은 분식회계도 하지 않고, 교육정책 결정권도 없고, 교사들의 노임을 깎지도 못하며, 교사 파면권도 없기에 교장은 사(使)로 볼 수 없다. 만약 교장이 진짜 사(使)라면 감히 그렇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몰라서 교장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의 질서와 기강을 파괴하여 학교를 망친 뒤에 자기 마음대로 학교를 농락(籠絡)하려는 것이다. 진보라는 단어 속에는 파괴의 의미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 하필 학교를 파괴시켜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인가! 기어코 학교를 봉숭아학당으로 만들어야 기분이 좋다는 말인가! 너무나 이상하게도 발딱 선생들은 앞길이 창창한 어린 학생들의 미래는 아무 관심이 없다. 선생이 학생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 교장의 약점캐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면 과연 제정신인가!

이와 같은 발딱 선생들의 짓은 학생과 학부모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장의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패륜아(悖倫兒)의 짓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학교가 붕괴된 원인은 교육정책의 잘못도 있겠지만, 학교마다 똬리를 틀고 앉아서 오직 교장에게 싸움만 거는 발딱선생들 때문이다. 오직 교장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바둑처럼 남의 말 잡아먹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자기 말 죽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대통령은 새로운 교육정책을 만들거나 교육비를 증액시키기 이전에, 다수의 훌륭한 교사들이 욕되지 않도록 교장을 향하여 독사대가리 같이 치켜드는 발딱선생들을 하루 빨리 제거해야 한다.

선생이 교장을 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이유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용납될 수가 없다. 만약 경찰이 경찰서장을 적으로 간주하고, 군인이 사령관을 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나라의 치안이나 국가안보는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 학교에서 제자들을 육성하는 일은 너무 큰 일이라 모두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힘을 모아도 잘 될까 말까한 어려운 일이다.

이제 세상이 크게 바뀌었으니 발딱선생들은 학교 망치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을 망치려고 해도 더 망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만약 아직도 학교를 망치려고 혈안이 된 발딱선생들이 설치는 학교가 있다면, 학부모비상총회를 열어서 처리하라. 절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안되면 결국 대통령이 나서서 교육을 바로 잡아야한다.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창립회원, 국민행동본부 자문위원 민관식 교장 :
gs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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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코리아 http://www.allinkorea.net/200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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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대, 개교 60주년 새로운 도약 기념 선포식 선언



공주대학교는 4월 21일(월) 오후 2시 본 대학 백제교육문화관에서 김재현 총장을 비롯한 사회각계인사, 교직원, 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공주대 개교 60주년 기념 엠블럼과 캐치프레이즈를 선포하고, 새로운 도약으로 대학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선포식 행사를 갖는다.

공주대는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대학 구성원과 동문, 학부모, 지역사회, 학생 등이 함께 하는 대대적인 사업으로 보다 대학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노력으로, 대학 구성원 및 일반인 대상으로 공모를 통해 선정된 수상작이 디자인 및 색보정 작업을 거쳐 최종 확정되어 이날 개교 60주년 엠블럼 및 캐치프레이즈 선포식을 갖게 된 것이다.

공주대학교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캐치프레이즈를 '60년의 박동, 세계의 심장, 공주대학교'로 정하고, 교내에 개교 60주년을 알리는 대형 현수막을 내거는 등 교육의 명문 대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교직원, 학생, 동문, 지역민 등 혼연일체로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새롭게 제작된 엠블럼 도안은 60의 숫자를 교육 역사를 상징하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을 색으로 표현하였고, 세 개의 캠퍼스를 60년 위에 배치하여 대학의 Tri-campus 체제를 표현하였다.

또한 대학 비전을 핑크로 표현하여 생동감 넘치는 삶의 빛깔을 의미로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공주대학교의 미래를 담아 세계의 명문 대학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날 김재현 총장은 “2008년 개교 60주년이 되는 해를 국내는 물론 세계를 향해 힘찬 도약하는 원년의 해가 돼야 한다”고 말하고 더불어 “60주년을 맞이하여 국내 5위권 대학 물론 세계에 유명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축사할 예정이다.

한편 공주대학교는 오는 11월 1일 개교 60주년으로 개교 60년사 편찬, 시민과 함께하는 공연, 국제 학술행사, 대학과 지역발전을 위한 세미나 등 학술행사와 문화사업, 체육행사 등 각양각색에 다채로운 사업들을 펼칠 계획에 있다. (공주=뉴스와이어)



출처 : 공주대학교


[뉴스와이어
www.newswire.co.kr 2008.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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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 출간

교과서포럼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대한민국 정통성 부각

현행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좌파적 이념에 경도되어 있다는 오랜 우려를 씻어주는 새로운 대안교과서가 25일 마침내 출간되었다. 이념적 편향을 바로잡겠다는 목적으로 지난 2005년 뉴라이트 계열의 지식인들이 발족한 ‘교과서포럼’(공동대표 박효종, 이영훈, 차상철)이 3년 동안의 작업 끝에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기파랑 간) 완성본을 내놓았다.

금년이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맞는 해이지만 우리는 ‘해방’은 기억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은 듣지 못했다고 술회하며 필자들은 “민족주의 사관과 분단체제론에 입각해 대한민국의 역사적 의미를 왜소화시킨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 위해 이 책을 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1948년 자유, 인권, 시장 등의 인류 보편의 가치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이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확보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건국의 진정한 의미가 교과서포럼이 펴낸 대안교과서의 기조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대안교과서의 집필에 전문적 역사학자의 참여가 없었다는 지적을 인정하면서 교과서포럼은 특정사관에 함몰되어 왜곡된 역사관에 빠지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온 과거를 맑은 거울에 비추어보려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대안교과서는 우편향이나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 교과서는 ▲한국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한국사의 주체를 ‘한민족’이 아닌 ‘한국인’으로 설정하여 민족주의와 거리를 두었으며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한 강압적 통치와 경제 개발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관점에서 기술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갑자기 솟아난 나라가 아니라 개화기 이래 많은 선각자들의 애타는 소중한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각하였다. 또 건국세력은 좌파가 말하는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음을 강조하고 그중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음을 밝혔다. 또한 4·19는 민주혁명으로 표현했고 5·16은 쿠데타라고 규정하지만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었다고 의미를 부연했다. 그리고 북한체제를 떠받드는 유일한 힘은 선군정치의 폭력이라고 평가했다.

주도적 집필을 담당한 이영훈 교수는 “대한민국 60년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현행 교과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하며 대한민국의 역사는 자유와 인권 그리고 인류 보편의 근대문명을 성취한 자랑스러운 역사이지 결코 부끄러운 미완의 역사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한편, 교과서포럼 측은 이 책이 당장 교과서로 채택되는 것은 아니지만, 2010년 현행 교과서가 개편될 때까지 교육부의 편수지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며 역사교육 현장에서 유력한 참고자료로 쓰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대안교과서의 집필 참여자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김영호 성신여대 정외과 교수,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등 12명이다.

김창범 편집위원cbkim47@hanmail.net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200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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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 전도사' 김상일 교수

"낙천가 김일성이 세운 나라의 사람들은 낙천적"

친북학자의 김일성 찬양 행위가 도를 넘은 모습이다.

사실상 '주체사상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상일前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24일 통일뉴스에 올린 "낙천가가 세운 나라 낙관한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일성과 북한체제를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김교수는 이 글에서 "김일성과 그가 세운 나라의 사람들은 이념을 논하기 전에 낙천가들이였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며 "김 사령으로 부터 배운 낙천성, 이것은 북의 힘의 원천"이며 "이는 마치 삼손의 머리털과 같다"고 했다.

"북의 힘은 미사일도 핵도 아니요 강고한 낙천주의"이며, 이같은 '낙천성' 때문에 홍수 피해 속에서도 아리랑을 공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은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고 보는 것이 지금 낙관주의자들(북한 인민)이 보는 견해"라고 주장했다.

글 마무리 부분에서는 "학습도 생활도 항일 유격대 식으로 사는 한 그들은 절망하지 않을 것이며, 이런 나라의 미래는 낙관해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김교수는 유사한 성향의 글을 이미 같은 매체에 수차례 연재해 왔다. 왕성한 집필활동도 하고 있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자료들은, 상당부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나온 것이다.(Konas)

다음은 김 전 교수의 24일 글 전문

낙천가가 세운 나라 낙관한다


‘1940년 봄’과 ‘2007년 여름’

지난해 북이 40여 년 만에 맞은 큰물 피해 속에서도 ‘아리랑’ 공연은 그대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좀 객기가 아닌가 하고 남한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번 수해 때에 노무현 대통령이 외유를 했다가 호된 여론의 화살을 받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런 논리로 북을 보면 서로 남북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열차와 같아 보인다. 수해는 비극 그리고 공연은 사치라고 생각하는 남한의 논리식대로라면 북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항일 유격대원들은 가장 어려울 때에 아니 그럴 때일수록 항상 연예 공연을 했다. 이렇게 역발상을 해야 북의 ‘아리랑’ 공연 강행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북의 이러한 남과는 다른 발상법을 우리는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절 ‘미래에 대한 락관’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940년 봄’,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해 봄에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시련을 겪었습니다”(8권-20쪽)라고 술회하고 있다. 회고록에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여간 어려워도 어렵다 소리 안 하는 것이 그의 생활 태도이고 보면 그해 봄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그해 봄, 그와 그의 유격대원들은 백두산 동북부 일대, 안도와 화룡 부근에서 유격활동을 벌리고 있을 때이다. 제일 어려운 것은 일제의 ‘파도식 토벌’이다.

수백명 혹은 수천명이 무리를 지어 마치 바다의 파도 같이 사방에서 덤벼드는 토벌 방법을 두고 하는 말이다. 토벌대장은 노조에였으며 그는 여러 차례 전투에서 김일성 유격대에 타격을 입고 부하들을 거의 다 잃고는 겨우 혼자만 살아남아 약이 오를대로 올라 있었다. 그는 봉천과 통화에서 증원군을 긁어모아 관동군마저 합세시켜 김일성 항일유격대에 대한 복수의 칼을 빼들고 덤벼들 때여서 말 그대로 파도에 휘말려 있는 것 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2007년 큰 물 피해 속에서도 ‘아리랑’ 공연을 강행하는 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초구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도 배가 고파서 산과 들판에 나가 산나물을 뜯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강위룡 소대장에게 부하들을 시켜 나물을 뜯어오게 하였다. 그런데 강 소대장 왈 보초 설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한다. 보초병이 안 되면 전령병들이라도 데리고 나가 나물을 뜯어 오라고 하였다. 강위룡은 전령병 전문섭, 이을설, 한참봉을 데리고 산나물을 뜯으러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 왔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이들 네 명은 하루 종일 나물을 한 바구니도 채 못 뜯어 왔다. 전 부대원들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사연이 이러하다. 전문섭과 이을설은 당시 나이 어린 소년병들이었다. 책임을 추궁 당하자 이 어린 전령병들은 천진난만하게도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꽃향기가 진동하는데다가 푹신푹신한 잔디밭을 보니 고향 생각이 절로 나고 봄 동산에서 즐겁게 뛰놀던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저도 모르게 씨름으로 한 나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8-23)라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전문섭과 한참봉은 나이도 비슷하고 힘도 비슷하여 씨름을 하다 보니 승부가 나지 않아 하루해를 다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대의 식량이 어려울 때에 산나물 해 오라고 보낸 대원들이 씨름으로 시간을 다 보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였습니다”. 물론 임무를 소홀히 한 이들 네 부하들에게 면피는 줄 수 없었다. 평소에 남달리 임무 수행을 철저히 해 온 이들이 오늘 따라 상상 밖의 행동을 한 데 대하여 김 사령은 엄히 꾸중을 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김 사령은 잠자리에 누워 네 사람들의 얼굴들과 나물바구니를 생각하며 “이 험한 판국에서도 우리 대원들이 비관을 모르고 배포 유하게 씨름까지 해가며 낙천적으로 살아가는구나 하는 깊은 생각을 하게 되고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나게 되었습니다”(8-24)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 한없는 희망과 기대를 걸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해방 후 김일성 사령과 함께 귀국한 133인 유격대원들 가운데 하나들이다. 이들은 해방정국 북에서 고위직을 갖고 일을 하였다. 지금은 80 고령이 되었을 그들의 당시 나이는 10대 초반이었다,

“비관주의 만큼 무서운 적은 없습니다”: 혁명가의 3대 특질은?

1937년 중일 전쟁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제는 동양 천지는 모두 일제의 마수에 다 삼킨다고 애국지사들, 심지어는 열혈 동지들마저 자포자기하고 비관주의에 빠진다. 국내의 최남선과 이광수, 윤치호 같은 지사 문인들이 변절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김일성 주변의 ㅌ.ㄷ 동맹의 동지들 심지어는 캬륜회의에서 피로 맺은 동지들마저 배신을 하고 변절자가 속촐 될 정도였다. 특히 림수산 같은 인물들마저 투항하여 토벌대의 앞잡이로 돌아다니면서 유격대의 위치를 찾아내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은 식량난보다 유격대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간도에서는 조선인들로 된 토벌대를 만들었으며 남한 창군 핵심인물들인 백선엽 그리고 김석원 등이 토벌대의 선봉장에 서서 설치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이 남양군도까지 확산되고 일본은 후방으로부터 군수물자 조달 등, 전선 확대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을 때가 1940년이다. 일제가 단말마적으로 동북아의 항일유격대에 달려들 때이다. 이를 보고 비관주의자들은 이젠 일본 천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유격대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김 사령은 “우리 대오에서 도주하는 자들을 보면 례외없이 미래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비관주의자들이었습니다”(8-30)라면서 “1940년대는 우리 대오에서 혁명적 낭만과 락관주의가 무엇보다 소중한 때 였습니다”라며 항일 유격대원의 3대 특질은 신념, 의지, 낙천이라고 정의한다.(8-29)

기자들이 어느 날 “주석께서 80에 50대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 장수의 비결은 낙천적으로 사는 데 있다”(8-29)고 대답했다. 우리는 북이 생존하는 비결을 바로 이 말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알았으면 용공하는 자들도 북의 이 특질을 알고 용공을 할 것이며 반공하는 자들도 이 특질을 알고 반공을 해야 할 것이다. 북의 아킬레스건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알고나 찬성도 반대도 하라는 것이다. 북을 지상의 가장 빈곤국가로 외부에서 볼 때에는 가장 불행한 나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 그런지는 안으로 들어가서야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평소에 이렇게 자신을 타고난 낙천가라고 했지만 이 말을 두고 그의 개인 성품으로 만 이해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의 낙천주의는 그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에게 이런 신념이 없었더라면 초기 유격대 활동 기간의 라자구 등판 위에서 꿈을 접고 말았을 것이다. 이제 남은 대원들은 수십명에 불과, 맨발로 눈 덮은 설령을 넘을 때 그들의 창자 속에 남은 것을 풀뿌리 나무껍질 하나 없었다. 그 때에도 그와 그의 동지들은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을 두고도 김일성 주석은 일본이 망하는 전주곡을 보았지 최남선 등과 같이 일본 천지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었다. 일본이 왜 망하는가? 일본이 이렇게 전선을 확대할 때에 후방으로부터 보급 물자가 조달이 안 될 것이고, 이러한 수순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때에도 세계 전쟁사 어디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과연 그의 낙관론은 그대로 적중, 중일전쟁 후 10년이 채 못 되어 일본은 망하고 말았다. 이광수와 최남선의 비관론이 틀린 것이었다. 적보다 우리 안에 비관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비관주의는 지독한 이기주의 혹은 편의주의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대열에서 이탈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물론 비관주의라도 수단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가정을 할 수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김일성 낙관주의의 특징이다.

김 주석은 일본의 승승장구하는 순간이 바로 일본이 스스로 족쇄를 차는 순간으로 사리판단을 한다. 이런 사리판단을 하는 주인공이 낙관주의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의 낙관주의는 타고나기도 타고났지만 그의 현명한 상황 판단에 근거한 과학적인 것이었다. 이는 김일성 주석 자신이 그렇게 자신의 낙관주의를 설명한 것이다, 회고록에서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얼간이 같은 배웠다는 당시 지식인 분자들의 배신과 배반은 모두 사리 판단을 제대로 못 한 데 근거한 것이다. 이런 지식은 무지보다 더 해악적인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 반세기가 지나가는 지금 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비관하는 자들로 탈북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반세기 전과 똑 같이 지금 북은 자본주의가 갈 때까지 다 갔다고 그리고 지금이야 말로 사회주의가 성공할 날이 다가왔다고 낙관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승승장구 바그다드를 점령할 때에 이제 세계가 미국의 단극 체제로 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었다. 그러나 이카루스같이 고공비행을 하던 미국의 다크 호스 미사일은 지금 사방에서 날개가 꺾이고 있다. 미국은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고 보는 것이 지금 낙관주의자들이 보는 견해이다.

낙천주의는 문예활동이 지탱시켜 준다

이런 낙천주의를 지탱시켜 주는 것은 문과 예 즉 ‘문예 文藝’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2007년 대 수해에도 불구하고 ‘아리랑’ 공연을 진행하는 진정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 재난의 시기에 공연 같은 것을 하다니가 아니고, 그러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것이 북과 남의 다른 논리인 것이다. 그것은 객관을 바라보는 낙관주의와 인간의 주관적 낙천주의야 말로 인간이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북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원들에 대한 신념 교양, 락관주의 교양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된 것은 문예활동이었습니다. 혁명적인 문화오락을 떠나서는 항일유격대 생활을 논할 수 없습니다.”(8-33)

북을 방문하면 군데 군데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 유격대식으로!”란 구호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유격대 식이란 그것이 결코 전투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보고 온 남측 사람들이 북의 호전성을 흉보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나는 유격대 식이란 어느 절박하고 험난한 순간에도 낙천성을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격대 식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악은 반드시 망하고 선은 반드시 승리하고 말 것이라는 신념과 확신에 근거한 낙천주의 말이다.

비관주의는 결국 인간 역사의 선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의 부족에 나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치 치하의 안나의 일기 마지막 구절 “나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다”야 말로 낙천의 정의이다. ‘낙천 樂天’이란 말 그대로 하늘의 선함을 믿는 확신에서 나온 즐거움이다. 이런 낙천은 오랜 고난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피바다’는 김일성주석이 행군 도중 쉬는 시간을 이용해 직접 쓴 것이다. 주석은 길림 육문 중학교에 다닐 때에 상월 선생으로부터 문학을 배웠으며 그의 서가에 있던 문학 서적들을 거의 빌려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만 잘 만났으면 그는 문학을 공부했을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에까지 이어지는 그의 문학에 대한 조예와 관심은 생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진다. ‘피바다’를 쓴 동기 가운데 하나가 그가 이광수의 ‘혁명가의 아내’를 읽고 이는 혁명에 대한 모독이요 인간의 본성을 비관주의로 바라보는 잘못된 소설이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남한 문인들은 순수문학 운운하면서 김 주석의 말을 비판할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문예에 대한 조예는 그의 끊임없는 독서에서 나온 것이다.

1940년 5.1절을 개구리 고기로 끼니를 이어도 “독립이 되면 평양에 가서 숭어국도 먹고 랭면도 한그릇 씩 먹고 모란봉에 올라가 대동강 구경을 하자!”고 부하 동지들의 아픈 마음을 달랜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부하들은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 중 박길송은 최후의 순간 “조국이여! 나는 그대를 자랑한다. 조국은 나의 청춘이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이처럼 웃으면서 죽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영원한 청춘을 살다 갔으며 그들은 죽음마저 낙천적으로 받아드렸다.

일제는 최희숙 여 유격대원의 두 눈을 뽑아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승리가 보인다”고 했다. 리재순은 단두대에 올라 서면서 “조국의 광복은 멀지 않았다”고 낙관적인 미래를 바라보았다.(8-38) 특히 리재순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면회 온 아내에게 세계 지도를 가져다 달라도 하였다. 사형수가 세계지도 공부를 하다니. 아니다, 그는 해방된 조국의 세계적 판도를 그려보기 위해서였다. 스피노자는 “내일 세계의 종말이 와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경구를 남겼고 해월 최시형은 수배자 신세로 피해 다니면서도 가는 곳 마다 과일나무를 심었다.

“아침은 빛나라” 영원까지

“유격대원들 만큼 혁명적 랑만과 열정으로 약동하는 생기발랄하고 전도가 양양한 군대도 없었습니다. 역경을 웃음으로 다스리고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는 사람들. 이 세상이 통째로 꺼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낙천가들의 집단이 바로 조선 항일 유격대원들 이었습니다”(8-24). 김 사령은 사람 됨됨을 그리고 끝까지 싸움을 해나갈 인물인지 아닌지를 그 성격이 낙천적인지 아닌지로 판가름했다는 것이다. 전문섭도 외형은 얌전해 보이지만 그래서 군인 기질은 없어 보이지만 그의 낙천적 성격 때문에 끝까지 그를 신임했다고 한다. 안길이를 특별히 총애한 이유도 그의 타고난 낙천성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환경론자들은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너무 비관적으로 그려내며 유토피아에 대하여 ‘디스토피아 DISTOPIA'라고 한다. 결코 이들이 진정한 환경주의자들이 될 것이라 믿지 않는다. 환경 단체들이 재벌이 집어주는 황금에 쉬 넘어 가는 것도 그들의 비관주의 때문이다. 도주자들 변절자들을 보면 한결같이 “상승할 때는 기류를 타고 우연히 대오에 뛰어들었다가 고난이 중첩되고 정세가 불리해지자 옛다 모르겠다 하고 나만이라도 살고 보자 하고 달아나 버렸습니다”.(8-20)

김일성과 그가 세운 나라의 사람들은 이념을 논하기 전에 낙천가들이였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김 사령으로 부터 배운 낙천성, 이것은 북의 힘의 원천이다. 이는 마치 삼손의 머리털과 같다. 북의 힘은 미사일도 핵도 아니요 강고한 낙천주의라는 사실을 알라. 큰물 피해 속에서도 아리랑을 공연하는 낙천성 말이다. “독립운동이 사상의지나 규율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의지, 도덕의리와 함께 랑만적인 감정정서를 가지고 하는 것이 일제와 싸우는 항일 유격 활동이었습니다.”(8-37)

학습도 생활도 항일 유격대 식으로 사는 한 그들은 절망하지 않을 것이며, 이런 나라의 미래는 낙관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회고록을 통하여 한 가지 역설을 공부하게 되었다. 인간이 역경일 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낙관적이 될 수 있다고. 내가 2004년 개천절 행사 차 동명왕릉을 방문하고 3대 헌장탑 앞에 도착했을 때에 시간은 저녁 5시 경,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브라스 밴드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고난의 행군을 이 한 구절처럼 잘 그려 낼 수도 있을까? 젊은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미래를 낙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조국”을 노래 부를 그 날을 그리며 웃으면서 영원으로 사라졌다. 이 순간 역설은 차라리 숭고하기까지 하였다.

김남균 코나스 객원기자(http://blog.chosun.com/hile3)

[코나스넷 http://www.konas.net/2008.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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