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정권 10년간 한국논단은 불온문서’

미래한국,
“월간 한국논단 李度珩 대표 인터뷰”



월간 ‘한국논단’이 오는 9월로 창간 20주년을 맞는다. 1987년 6·29 선언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시대를 열었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좌파적 가치관이 쏟아지면서 사상과 이념의 혼란과 대립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1989년 한국논단이 창간됐다. 사회 각계각층에 스며든 좌경 사상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국가체제를 지키자는 취지에서 ‘나라를 지키는 잡지’라는 기치를 들고 출범됐다.
한국논단의 창간과 발전의 중심에는 이도형 사장이 있다. 그는 육군 대위로 전역한 후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 논설위원(1985), 관훈클럽 총무(1986) 등을 역임했고 1989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논단을 이끌어왔다.

한국논단은 짧은 기간 급성장했고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매체파워를 지닌 중견 언론매체가 됐다. 1997년 대선 당시에는 주요 대선후보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열고 이것이 KBS, MBC, SBS 등을 통해 생방송으로 방송되면서 화제를 쏟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시절의 한국논단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지난 10년 좌파정권을 거치면서 그 영향력이 조금씩 줄어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미래한국>은 지난 8월 초 서울 한 호텔 커피숍에서 이도형 사장을 만나 한국논단이 걸어온 길에 대해 들어봤다.
이도형 월간 한국논단 발행인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이도형 사장은 지난날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먼저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입니다만,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한국논단’이라는 잡지를 적서(赤書)처럼 여겨요. 옛날에 적색잡지를 적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처럼 한국논단을 불온서적으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한국논단을 본다고 연행된 사람까지 있었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우파언론을 탄압하는 좌익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저는 좌익이라는 말보다 ‘적색분자’라는 말을 씁니다. 적색분자라는 말은 선전선동에 능한 골수좌파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들의 머릿속이 빨갛게 물들었다는 말이에요. 오랜 반복교육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가장 신봉하는 수단이 바로 반복교육이거든요. 오래 반복하면 가짜도 진짜처럼 되니까요. 그런 적색분자들이 이 나라에 판치고 있습니다.”

탄압의 발단, ‘대통령후보 사상검증 토론회’

제15대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둔 1997년 10월 8일 일개 월간지에 불과한 ‘한국논단’이 타워호텔에서 김종필, 김대중, 조순, 이인제, 이회창 등 다섯 명의 대선후보들을 초청하여 ‘대통령후보초청 사상검증 대토론회’를 개최해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TV에서 여러 모양의 후보초청 토론회가 열렸는데, 내가 볼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안보문제를 묻거나 대답하는 일이 없더군요.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친미주의, 또 안보문제 이런 걸 중심으로 후보들한테 확인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날 토론회는 MBC, KBS, SBS 등 3대 지상파 방송들이 생중계에 나서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토론회로 말미암아 이도형 사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깊은 앙금이 생겼고, 이 사장의 인생에 있어 고비를 맞게 했다.

김대중 후보는 당시 토론회에서 두 번째 연사로 등단했다.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게 하는 과거의 발언과 행적들을 놓고 김 후보의 사상에 대해 설왕설래가 나왔다. 그러나 김 후보는 자신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임을 역설했다.

토론회 도중 김대중 후보의 거짓말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는데 당시 김 후보의 답변이 두고두고 세간의 화제가 됐다. 김대중 후보가 “나는 평생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 이날 토론회 이후 김대중 후보 측은 분노했다. 자기 쪽에 호의적일 것으로 생각했던 이도형 사장이 ‘김 후보를 마치 초등학생을 다루듯 오만방자하게 대했다’는 것이 이유였고 그것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이 사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울지방검찰청의 담당검사는 고발내용에 대해 구체성이 없어 범죄구성요건이 안 된다며 무혐의 처리했으나, 김대중 정권하에서 3번이나 계속된 고소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담당검사는 전주지방검찰청으로 좌천됐고 이 사장은 2년 징역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억대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결국 집은 경매로 날아갔고 친구의 도움으로 전셋집에서 겨우 살아야 했다.

또한 당시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질문 도중 “돈을 받아먹고 이름을 팔아먹는 시민단체들이 있다”며 경실련, 참여연대, 민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화근이 돼 그들로부터도 억대 배상 고발이 들어와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최근에도 캐나다의 한 한인단체로부터 고발장이 날아 왔어요. 한국논단 2005년 5월호에 좌파를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에 자신들의 단체가 거명돼 명예훼손이 됐다는 것입니다. 캐나다 변호사를 통해 벌금 150만 달러에 손해배상 10만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한국논단을 없애려는 좌파의 집요한 계획이 아니면 무엇 입니까.”

이처럼 한국논단은 지난 20년간 좌파세력의 공격목표가 돼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논단이 이념투쟁의 최선전에 있어 왔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이도형 사장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 한국논단이 올 9월로 창간 20주년을 맞는데 감회가 어떤지요

“1989년 6월 창간 당시 기업인, 언론인, 학자 등이 주주로 참여했어요. 우리나라의 기존질서와 가치가 뒤집혔다는 점에 공감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정론지로서 한국논단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나 일본의 산케이와 같은 보수언론으로 활동하기를 기대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때 위기감이 20년이 지난 지금 더 심해졌다고 생각해요. 이른바 소명감이 더 깊어졌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좌익세력이 더 넓게 확산됐기 때문입니다. 전교조다, 민노총이다 해서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습니다.”

- 지난 20년간 그토록 전력을 다해 싸워온 대상이 누구입니까?

“김대중, 노무현, 김정일 등으로부터 지령이나 영향을 받는 세력이었습니다. 1946년 9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단체가 발표한 ‘남한의 20개 좌익정당단체 구성원’이라는 자료를 보면 모두 797만 명이 그 구성원으로 등재돼 있어요. 당시 2,000만 명 인구로 볼 때 상당한 세력이었어요. 말하자면 그들이 모두 ‘빨갱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허수가 들어 있지요. 첫째는 농민회 소속 340만 명이 포함돼 있었는데 당시 그들 대부분은 문맹자였어요. 그들이 가입신청서를 냈을 리 만무한 것이지요. 또 재일조총련 120만 명도 허수입니다. 그만한 수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들을 제외해도 400만 명이라는 좌익세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적들’

“해방 후 정부의 노력으로 이 가운데 140만 명이 전향한 것으로 돼 있지만 6·25가 발발하자 그들 대부분은 다시 좌익세력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전란 가운데 양민학살에 앞장선 ‘빨갱이’들입니다. 그 대표적 공산당 조직이 소위 보도연맹입니다. 김대중도 당시 보도연맹 소속이었지요. 전후 2개 세대가 지나가며 그 좌익세력은 1,200만 명으로 불어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상당수는 정권이나 국가로부터 불이익을 받은 불만세력으로서 체제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역사 뒤집기에 앞장서 입법, 행정, 사법에 침투하여 대한민국을 없애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싫고 대한민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파괴주의자들이지요. 곧 대한민국의 적들입니다.”

- 그들(좌파)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해방 직후 미군 군정에 불만을 가졌거나 지주들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입니다. 그들은 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여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한 현실 불만세력들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들을 조직적으로 흡수해 좌익사상을 집어넣은 것이지요. 앞서 얘기한 대로 반복교육을 통해 빨갱이를 만든 것입니다. 해방 직후 학교에서는 동맹휴학이란 것이 자주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그 대표적 불만세력들입니다. 이때 학도호국단이 조직되면서 그 불만세력들이 약화됐던 일을 기억합니다.”

-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는데, 어떠한 변화가 있었다고 평가하십니까

“좌익의 선전선동 수단인 지상파 방송을 아직도 정부가 장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미디어법이 통과되기는 했지만 누더기가 돼 그 효과는 두고 봐야 합니다. 또 수사기관인 경찰, 국정원, 기무사 속에 있어야 할 ‘적색분자’들을 색출해내는 기구가 없어졌어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국민 개인의 신원을 확보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좌파정권 10년 사이에 그러한 기능이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신원진술서 제도나 호적제도가 사라진 것은 국가체제를 관리하고 통솔할 근거가 사라진 것입니다.”

김대중의 자기 사람 만들기 수법

- 그동안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역시 앞서 얘기한 15대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지요. 그 외 김대중 씨에 대한 일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여러번 만나 교류도 나눴지만 이 사람처럼 똑똑하고 말을 잘하면서도 진실성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김대중 씨는 대통령이 되기 전 아마도 나를 자기 사람으로 쓰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집요하게 그러한 접근이 있었지요. 예를 들어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에 나오기로 했을 때에는 당시 박지원 특보가 의외의 얘기를 했어요. 김대중 총재가 토론회에 나오면 내가 그에게 충성하기로 했다고 전했다는 거예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 사람을 옭아 매는 수법이죠.

또 한 번은 관훈클럽 스태프들과 함께 김대중 총재와 식사를 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김 총재에게 ‘만약 집권하면 국방 장관은 어떤 사람을 세울 것인가’ 물었어요. 그런데 이후 ‘이도형이 김대중 내각에 국방 장관이 된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하루아침에 내가 김대중의 사람이 된 것이죠. 솔직히 누가 장관을 시켜준다는데 싫어하겠습니까. 김대중 씨의 머리를 당할 사람이 없어요. 이것이 김대중 씨의 사람 묶어놓기 수법입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중심과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는 원래부터 철저한 사회주의 신봉자입니다. 해방 후 20대 나이에 공산주의자 백남운이 대표로 있던 좌익정당인 조선신민당의 당원이 되었지요. 이 당은 나중에 남로당과 통합되면서 해체되었습니다. 6·25 때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그 후 이념적으로 잠재돼 있다가 워낙 똑똑하고 말을 잘 하니까 1961년 정계 진출 수단으로 한민당에 입당해 활동을 시작했고 1971년에는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나서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일본, 미국 등지로 나가서 진보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다시 사회주의자로 거듭나게 되었지요.

김대중 씨는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정책에 관심이 많은 좌파 정치인입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반공연설에도 아주 능합니다. 이념적 위장전술에 달인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궁극적 목표는 통일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이 대표하고 남한은 김대중이 대표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한반도에 실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통일대통령으로 등극하는 것이었겠지요.”

- 그렇다면 남북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자유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헌법 제4조에 입각하여 통일이 되면 되는 것이지요. 자유민주주의를 따라야 합니다. 통일에 자유가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자유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북한에 김정일 체제가 있는 한, 자유통일은 어렵다고 봅니다. 60년을 버텨온 북한체제를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북한 지도부가 신념을 잃고 흔들리면 북한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1989년 여름 동독이 무너질 때 수십만 명의 동독사람들이 이웃 나라로 탈출을 감행했는데 그때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과 같은 좋은 이웃들이 있었기에 난국을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북한 붕괴 시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 대한민국의 앞날을 어떻게 예상하고 있습니까?

“희망적으로 내다보고 싶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하나의 과도정부입니다. 진짜 우파정부를 위해 교두보 역할을 하면 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우파정부가 들어서면 특별한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법대로만 다스리면 됩니다.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고 범법자는 법대로 잡아가두면 되는 것이지요. 제2연평해전에서 6명의 귀중한 우리 장병들이 숨졌고 평택의 미군기지 이전반대 시위에서는 무장해제를 당한 현역군인들이 시위대에 두들겨 맞았어요.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당시 대통령이 법집행을 중단시켰기 때문에 일어난 희생입니다. 법치가 마비된 나라가 어떻게 되는가를 잘 보여준 일이지요.”


“법대로만 하면 된다”

“김대중 같은 인물도 사전에 법대로 처리했으면 오늘과 같은 후환이 없었을 것입니다. 1997년에 당시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DJ가 비자금 670억 원을 조성하여 62억 원을 불법 실명 전환했다’고 폭로한 바 있어요. 이때 김영삼 정부는 곧바로 수사를 했어야 해요. 그런데 수사중단을 검찰총장에게 지시했었지요. 참 딱한 일입니다. 김대중 측이 ‘만약 검찰이 수사를 강행하면 대선은 없어지고 민란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협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정치보복이 가해졌고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10여 명의 안보전문가들이 북풍조작사건으로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고 또 김대중 비자금과 관련해 실향민들이 세운 동화은행이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 한국논단이나 이 사장이 ‘극우 아니냐’는 일각의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극우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에 있어요. 극우단체들의 특징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이지요. 미국의 KKK단이나 독일의 히틀러, 일본의 군국주의 단체 등이 그렇지요.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이 있습니까? 내가 왜 극우입니까? 나는 붓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할 뿐이지요. 나는 언론인이고 보수주의자일 뿐입니다.”

- 많이 어려우실 텐데 한국논단 운영은 어떻게 하십니까?

“좌파 매체들은 지난 10년간 호황이었습니다. 모 온라인 뉴스매체는 하루 광고수입이 2억5,000만 원에 달한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좌파매체에 대해서는 기업들이 돈을 퍼붓다시피 해요. 내가 아는 어떤 기업은 규모가 큰데도 한국논단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겁니다. 세무조사가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소위 좌파 끄나풀들이 큰 기업마다 다 들어가 있어요. 이들이 우파 매체로 들어가는 광고비를 감시한다고 봐야 해요. 그러니 광고 영업을 하기가 아주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래서 한국논단은 현재 거의 혼자서 영업하고 편집하고 있습니다. 인적으로나 물적으로 어렵지요. 정상적인 광고 영업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도형 사장은 작년 ‘이도형의 자전적 현대사 비판’이라는 부제가 붙은 ‘조선인 한국인 비한국인’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나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이고 싶다. 나는 모든 조직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한다”고 썼다.

자유에 대한 그의 갈망은 개인적 소망이라기보다는 이 나라, 이 민족을 향한 양심적 갈구가 아닐까. 이 사장은 향후 계획에 대해 묻자 “한국논단을 젊은 언론인에게 맡겨두고 진정한 인생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했다.

김창범 미래한국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코나스 http://www.konas.net/2009.9.2]


Posted by no1tv


“우파적 사고가 성공을 부른다”

이근미가 뛴다 _ ‘1인 기업가’ 공병호 박사 인터뷰


2001년 10월, 41세에 1인 기업가로 나선 공병호 박사는
지난해 저술과 강연, 자기경영아카데미 운영으로 10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성공비결을 ‘자신만의 확고한 생각과 콘텐츠를 만드는 능력’이라고 분석했다.

공병호 박사
공병호경영연구소를 운영하는 1인 기업가 공병호 박사(경제학)를 만나 “비서가 있으면 1인 기업이 아니지 않느냐”고 딴지를 걸었다. 그는 허허 웃으며 비서 한 명이 상근하고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사람을 동원한다고 말했다. 공병호 박사는 국토개발연구원과 한국경제연구원을 거쳐 자유기업원을 창설하여 초대 원장을 지냈다. 그후 인티즌과 코아정보시스템 대표를 역임했다.

2001년 10월, 41세에 1인 기업가로 나선 그는 지난해 저술과 강연, 자기경영아카데미 운영으로 10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누구나 연봉 7천만 원 프리랜서가 될 수 있다>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공 박사는 세금을 제하고도 매월 7,000만 원 이상 벌고 있다.

그는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자발적으로 새 삶을 찾아 나섰고, 목표를 달성했다.
“남이 만들어준 자리는 한계가 있어요. 연구소를 잘 만들어서 키운다 해도 60, 70세가 되면 그만두어야 하잖아요. ‘내가 이 정도 그릇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 연구소 더 키우는 걸로 만족할 수 없다, 노력해서 부유해져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새 출발을 했습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성공비결을 ‘자신만의 확고한 생각과 콘텐츠를 만드는 능력’이라고 분석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직장생활 할 때 관리 능력, 콘텐츠 만드는 능력, 강연하는 능력 등을 트레이닝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기초작업이 잘 되어 있었지요. 가장 큰 건 책임지려는 자세입니다. 저 자신을 믿으니까 조직을 떠나 오늘까지 온 겁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번영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을 반듯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인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게 되어 기쁩니다.”

‘젊은 보수 꼴통’이라는 꼬리표
지난 10년 간 좌파가 목소리를 높일 때 우파 젊은 지식인들은 보수 언론의 원고 청탁이나 인터뷰 요청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 생으로 386세대인 공병호 박사는 자신의 신념을 거리낌없이 펼쳤고 그런 그에게 ‘젊은 보수 꼴통’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전경련을 비롯하여 500여 명에게 도네이션을 받아 자유기업원을 개원했을 때도 시끄러웠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저는 기업가 정신을 갖고 인생을 살아요. 제가 가진 신념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신념대로 밀고 나온 겁니다. 말이 많을 때 ‘죽은 개는 차지 않는다, 살아 있기 때문에 발로 차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남의 눈치볼 거 없잖아요. 제 소신대로 살아온 건 아마도 촌 출신의 근성이 있어서 그럴 겁니다.”

공 박사는 경남 통영 출신이다. 그는 우익적 사고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단호하게 얘기하는데 우익적 사고를 갖지 않으면 잘 살 수 없어요. 올바르고 건강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평생 다른 사람들 장단에 춤추다 갑니다. 비참한 인생이죠. 자녀에게 건강한 생각을 심어주고 젊은이들에게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확산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지난해 촛불집회 때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고 한다.
“자기 관리를 잘하면 특별한 불행이 끼치지 않는 한 잘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생각이 비뚤어지면 모든 게 끝입니다. 촛불집회 때 자녀를 모두 데리고 나간 친구들이 많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의 뜻에 따라 움직이면 안 된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라’고 가르쳤더니 아이들이 집회에 나가지 않더군요. 영어 잘하고 좋은 대학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루 5시간 수면, 금주 금연, 저녁 약속 안 잡기 등 자기 관리에 철저한 것으로 유명한 공 박사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 모임을 비롯하여 꼭 필요한 모임에는 나간다고 말했다.

“한 번 마셨다하면 일주일이 피곤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겁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골프 대신 러닝머신으로 운동합니다. 세상살이가 간단하지 않고 다 잘할 수 없기 때문에 절제를 하는 거죠. 자기관리를 하지 않으면 롱런 할 수 없어요. 나 자신을 관리하여 성과를 내는 일이 재미 있고 아름답습니다.”

강연하는 것과 책 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긍정적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공 박사는 강연할 때는 ‘동감의 힘’을 늘 생각한다.

“한국 학자들은 로맨티스트, 나는 실용주의자”
“최근에 성균관대생 800여명, 경희대 교직원과 의사, 평창 군민, 여고 총동창회 모임 등 다양한 청중들 앞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긴장감이 있지요. 90분 동안 밸류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동하면서 이 분들에게 무얼 얘기해줘야 하나 늘 생각합니다. 제가 경제학을 했지만 인생살이, 자녀교육, 성공학 등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대한민국 학자들은 로맨틱한 편인데 저는 실용주의자입니다.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에 저를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공 박사는 어디를 가건 캐리어 가방을 끌고 다니는데 그 안에 노트북, 상비약, 면도기, 스톱워치 등 다양한 물건이 들어 있다.

“이동하면서 한시도 쉬지 않습니다. 스톱워치로 공부는 얼마나 하고 일은 얼마나 하는지 잽니다. 수요일이면 다음 1주일 강연 준비가 끝납니다. 1주일 단위로 내 삶을 컨트롤하면서 살지요. 준비를 잘하면 불안감도 없고 스트레스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는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10분이건 20분이건 일에 몰두한다.
“바로 가속도가 붙어요. 빨리 전환이 안 되고 워밍업을 해야 되고, 이런 건 핑계죠. 국가경영, 회사경영, 자기경영은 다 똑 같은 원리입니다. 관리를 잘하면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환경과 조건을 따질 이유가 있나요. 집안 탓할 것도 없습니다. 가난하면 부자들이 가질 수 없는 인생의 포부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40대에 퇴직을 강요받는 직장인들을 위해 짧은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전쟁도 없고 굶어죽을 염려도 없습니다. 걱정을 하는 분들에게 진짜 노력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잘해서 어떻게 입신할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처럼 마케팅비가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블로그만 잘 만들어도 길이 열립니다. 일단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무언지 생각하시고, 그 일에 집중하십시오.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금물입니다. 하다보면 기회가 생깁니다. 단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는 직장을 떠나면 안 됩니다.”

공병호 박사는 2002년부터 67권의 책을 냈다. 직장 다닐 때 낸 것까지 합치면 모두 91권이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전쟁하듯 글을 쓴다고 했다. 가장 최근에 출간한 <공병호의 소울메이트>(흐름출판 刊)는 한 달도 되지 않아 3만 부를 넘어섰다. 공 박사의 저서는 어떤 책이든 출간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91권의 저서 출간
“제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해 계속 토픽을 옮겨가며 공부합니다. 다작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다작을 한다는 건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한다는 뜻입니다. 책을 팔기 위한 노력 대신 독자가 돈을 내고 사볼 만한 값어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용하면 무한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살다가는 건데 좀 다부지게 살아서 저의 극한치를 발휘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중에서 <공병호 자기경영노트><10년 법칙><공병호의 초콜릿><한국, 번영의 길><인생의 기술><부자의 생각 빈자의 생각>을 미래한국 독자들에게 추천했다.

그가 2004년에 낸 <10년 후, 한국>은 4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그 책에서 그는 “10년 후 한국을 대표하는 두 단어는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이 될 것이다. 저성장과 고실업은 구조적인 현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책임질 만한 사람들이 장기적인 계획과 소신을 갖고 난제들을 해결할 가능성은 불행하게도 거의 없어 보인다. 앞으로 10년, 경제가 어려워져도 진보 진영은 득세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언론을 통해 보수 진영의 늙고 무능함, 부패를 지적함으로써 장기집권의 초석을 다질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그 책을 발간한 후 4년 만에 정권이 교체된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언서가 아니라 이 상태로 가면 힘들 거라고 경고한 서적이었죠. 당시 정권 교체가 상당히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분만 틀렸고, 나머지는 그대로입니다. 지금 바뀐 게 하나도 없어요. 인권위원회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고 있잖아요. 이 대통령 자신이 미래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지도자는 지적 인프라가 있어야 하는데 이 대통령은 30대에 사장이 되셨으니 지식을 축적할 시간이 없었겠지요. 참모를 잘 두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통령 자신의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빌릴 수 있는 머리가 있고 빌릴 수 없는 머리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회색 정권”
공 박사는 현 정권의 색깔을 회색이라고 규정했다.
“방향이나 그림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경기부양을 한다고 돈을 엄청나게 쓰는데 돈을 푸는 것과 동시에 비효율 고비용 부분을 구조조정 해야 하는데 겁이 나서 안 합니다. 은행보고 자꾸 돈 빌려주라고 하는데 옛날과 다른 게 뭐 있습니까. 너무 많은 과제 다루지 말고 수용 가능한 주제만 다루면 좋겠습니다. 경기를 회복시키되 지나치게 재정 팽창이 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노사문제, 공기업 문제, 교육개혁 문제, 수도권 문제 등 몇 개 분야만 정해 선명한 조치를 취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대통령이 너무 바쁘고, 사람을 제대로 못 움직이는 것 같아요.”

공 박사는 현시점에서 ‘10년 후 대한민국’을 대단히 낙관적으로 바라봤다.
“훈련받은 젊은 인재가 많고 한국 기업이 상당수준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정치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닿지만 않으면 잘 할 것으로 봅니다. 정치가 최악의 상황으로 갈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언론이 조작하고 세뇌하고 별 짓을 다했지만 국민이 정권을 교체시켰습니다. 이제 조작은 힘듭니다. 우리 국민은 현명합니다.”

그의 이런 판단은 2002년부터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수많은 대중강연을 한 후에 얻은 결론이다.
“한국인들은 더 잘 되어 보려는 욕심이 많고 대단히 긍정적입니다. 지도자들이 잘 이끌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교육개혁이 반드시 성공해서 애를 많이 낳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지방으로 갈수록 고령화사회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지자체에서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고 울컥할 때도 많았습니다. 애국심이 많이 생겼죠.”

내년이면 50세가 되는 그는 요즘 자신의 ‘50년사’를 집필하고 있다.
“성공과 실패, 아쉬웠던 점을 되돌아보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 같은 특별한 삶이 아니라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시대를 살아온 평범한 과정을 돌아보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40년을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어요. 어떻게 해야겠다고 계획하면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쓰고, 강연하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겠지요. 책을 중간쯤 쓰다보면 다음에 무슨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때 그때 운명이 자신을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을 열심히 살 뿐입니다.”

그는 운을 믿는다고 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문장이 ‘Are you ready?’(준비됐나요?)이다.
“늘 깨어 오감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살다보면 운이 다가옵니다. 저는 운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늘 긴장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순간 필이 꽂힐 때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나는 운을 놓친 적이 없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젊은 정신으로 살고자 애쓴다.
“격이나 의전을 별로 안 따집니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를 만나든 정중하게 대하고 몰입합니다. 무엇을 하든 충실하려고 애쓰지요. 세상사에 호기심이 많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하니 모든 게 재미 있어요. 저는 성격이 급하고 완벽하지 않아요. 저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죠. 참을성 있게 부드럽게 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비법을 묻는 필자에게 “세속적 성공에 연연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당부했다. 덧붙여서 “나중에 책이 잘 나가면 절대 폼잡지 말라”고도 했다. 다음 강연을 위해 일어서던 그는 인터뷰 도중에 여러 차례 했던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남 눈치 볼 거 뭐 있어요. 남이 내 인생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남이 무얼 하고 사는 것에 참견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이 한가하지 않으니까요. 내 신념대로 내 방식대로 열심히 살면 됩니다.”

글·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정호정 인턴기자 beckham7kr@naver.com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200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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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가장 멋있는 죽음’

‘愛國의 가시밭길’ 국민행동본부 徐正甲 본부장 인터뷰..
“주변의 회색분자들을 쏙아내라”고 충고



어둠이 있다면 빛이 있다. 정권교체 이후에도 좌익의 蠢動(준동)은 그칠 날 없지만, 애국세력은 깽판을 누르는 抗體(항체)로 기능한다. 국민행동본부(國本, 본부장 서정갑)는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다.

좌파정권 종식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國本은 2008년 더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지난 해 주요 일간지 의견 광고만 52회. 주간지·월간지 등을 합치면 84회의 의견 광고를 냈다. 2월22일 盧武鉉에 대한 형사고발(내란죄 外) 등 국가정체성 회복을 위한 운동도 계속됐다.

<정권교체 이후 더 바빠진 국민행동본부>

많은 이들은 더 이상의 시청 앞 애국집회는 없을 것이라 기대했다. 70~80대 노인들의 아스팔트 투쟁도 이제는 편하게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좌파의 광우병 亂動(난동)은 소박한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렸다. 左派淸算(좌파청산)과 法治回復(법치회복)을 요구하는 애국집회는 재개됐고, 國本 역시 解決士(해결사)로 다시 나섰다.

2008년 6월10일 서울시청 광장 「法질서수호·FTA 비준촉구 국민대회」, 6월20일 여의도 MBC 본사 앞 「선동사령부 MBC 규탄집회」에 이어, 7월15일 서울강연(용산 전쟁기념관), 7월17일 대전강연(중구 향군회관 강당), 7월26일 부산강연(부산일보사 대강당), 8월6일 경북 울진강연(울진읍 청소년수련관), 9월10일의 속초 강연 등 전국적인 순회강연이 이어졌다.

反좌파 투쟁의 10년에 또 다시 1년을 보탠 徐正甲(서정갑) 본부장은 『정권교체 이후 마음은 편해졌지만, 더 힘든 부분도 많다』고 말했다.

『盧武鉉 정권 때는 목표가 분명했고, 대상도 명확했습니다. 左派(좌파)정권을 상대로 利敵(이적)행위를 비판하면 국민적 호응도 뜨거웠죠. 보수정권이 탄생한 뒤, 어이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부 안에는 左派부역자들, 기회주의자들이 여전히 득실거립니다. 김황식 감사원장의 「극우」 발언은 속을 뒤집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우리 힘으로 만들어 낸 보수정권을 상대로 反정부 투쟁을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애정 어린 「對정부 충고」와 MBC 등을 상대로 한 「對좌파 투쟁」을 병행해야 하니 어떤 면에선 어려움이 더 많습니다』

徐본부장은 많은 우파인사들이 그러하듯, 李明博(이명박) 정권에 대한 복잡한 속내를 여러 차례 토로했다.

『제대로 된 우파정권이라면 金大中-盧武鉉 밑에서 충성했던 核心(핵심)인사들은 솎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행자부, 국정원, 경찰, 검찰, 법원 등 좌파세력이 심어놓은 대못들이 뽑히질 않고 있죠. 문제는 이런 대못들이 좌파의 不法(불법)과 깽판을 묵인하고, 방관하고 심지어 후견하는 데 있습니다. 지난 번 국회난동 때 절대다수 의석을 가진 한나라당의 무능함은 또 어떻습니까? 좌파정권 종식을 위해 피눈물 나게 싸워 온 우리로선 허탈감이 느껴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정권퇴진을 주장할 수도 없고...』

보수인사들의 집회나 모임에 가 보면 『이러려고 좌파정권을 종식했었나?』라는 말을 쉽게 듣는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대통령이 답답하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徐본부장은 李明博 대통령에게 『주변의 회색분자들을 솎아내야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충고했다.

『대통령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요즘 같은 세계적 불황 속에서 경제를 살리려면 法治를 回復(회복)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不法과 暴力과 거짓을 사용하는 左派를 淸算(청산)해야 합니다. 이번 개각에서 확고한 국가관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그리 많이 않다는 것을 대통령께서 아셔야 합니다』

<끝없는 고소·고발, 여전히 가시밭길>

정권교체 이후 徐본부장의 어려움은 現정권에 대한 답답함에 그치지 않는다. 우선 2004년 10월4일 「국가보안법死守(사수)국민대회」 관련 항소심 재판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徐본부장은 다른 우파 인사들과 함께 지난 해 4월23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違反·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징역1년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경찰의 노인폭행에 격분한 몇몇 참석자들의 반발과 관련, 徐본부장에게 共謀(공모) 혐의를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과 법원이 共謀(공모)했다고 판단한 이들은 徐본부장과 유대관계가 없는 사람, 심지어 재판정에서 처음 본 不면식의 사람도 있었다.

지난 8일에는 300만 원의 罰金刑(벌금형)이 떨어지기도 했다. 육·해·공군·해병대예비역대령연합회가 허위사실 유포 등을 이유로 모 회원을 제명하고 會報(회보)를 통해 공지했는데, 제명당한 회원이 徐본부장 등 대령연합회 전·현직 회장을 상대로 고소·고발한 것이다. 대령연합회 총회는 물론 운영위원회, 육·해·공군·해병대 및 여군 등 5개 직능연합체가 결정한 사항을 공지한 것임에도 검찰은 이를 기소했고, 법원은 실형을 선고했다.

徐본부장은 『좌파정권의 눈엣가시였던 대령연합회에 대한 陰害(음해) 과정에서 불거진 일에 대해 이런 식의 판단이 내려진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대못은 MBC>

지난 10년은 가시밭길이었지만, 國本은 2009년에도 많은 과제를 앞두고 있다. 김황식 감사원장 件(건), 국가인권위원회 件(건) 등.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일은 MBC 문제이다. 徐본부장은 최근 구성된 「MBC방송허가취소汎국민운동본부」에 姜東淳(강동순) 前방송위원과 함께 상임공동의장에 위촉됐다.

奉泰弘(봉태홍) 라이트코리아대표가 운영위원장을 맡은 이 단체는 1월16일 방송통신위원회 앞에서 「MBC방송허가취소 촉구 기자회견」을 비롯해 1월19일 국회 앞 「방송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 1월20일 MBC본사 앞
「MBC OUT 가두 캠페인 서명 및 책자 스티커 배포(2차)」, 1월21일 서울지방검찰청 앞 「MBC PD수첩 엄정수사촉구 기자회견」, 1월22일 청계광장 「MBC OUT 가두 캠페인 서명 및 책자 스티커 배포(3차)」, 1월23일 서울역 광장 「MBC OUT 설 귀성객 대상 서명 및 책자 스티커 배포(4차)」 등 행사를 앞두고 있다.

『MBC는 좌파가 박아 놓은 가장 큰 대못입니다. 광우병 난동 때도 확인됐지만, 온갖 왜곡·날조·편파방송으로 국민여론을 호도해 온 집단이 MBC입니다. 이번엔 철밥통을 사수하고, 좌편향 보도를 계속하려고 미디어法 개정 반대에 필사적입니다. 그러면서 공정성, 공공성 사수를 위한 것이라고 또 다시 국민을 기만하고 있죠. MBC가 갈 길은 이제 방송허가 취소 말고는 없습니다. 이것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대규모 집회로 이어질 것입니다.』

<나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가장 멋있는 죽음>

國本의 많은 활동을 뒷받침할 재정적 후원은 아직 녹녹치 않은 상황이다.

國本은 지난 달 10일 뉴라이트전국연합 등과 함께 개최한 시민단체 공동후원행사에서 모금된 후원금을 수령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금된 액수가 많지 않았을 뿐더러, 國本과 함께 대거 참여했던 20여개 정통보수 단체들에게 공동 배당돼 수령 자체가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 이후 더 열악해진 보수단체의 재정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國本은 지난 해 10월27일 법인설립이 이뤄졌고, 12월30일 법인세법시행령에 따른 지정기부금단체로 지정됐다. 이로써 향후 5년간 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됐다. 최소의 자금이 확보되면, 다양한 사업도 추진될 예정이다. 다음 달 3일~6일 사이에는 대방동 여성회관에서 청년대학생 강좌도 진행된다. 이밖에도 지속적인 강연회와 신문광고는 계속될 것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최근 공안기관이 파악한 북한의 소위 反北인사 테러지령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徐본부장은 담담했다.

『북한에서 보면 저는 가장 껄끄러운 사람 중 하나겠지요. 하지만 테러건 뭐건...군인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 나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가장 멋있는 죽음입니다.』


김성욱(프리랜스 기자)


[코나스
http://www.konas.net/200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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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정“북 청소년 일탈현상 심각”

코나스와 인터뷰,

“남한의 젊은 층과 학생계층 공략 전략 목표 세울 가능성 높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경쟁적으로 진행한 1989년의 평양축전 준비과정에서 매우 적극적 양식으로 서구적 문물에 대한 수용을 정부당국 차원에서 시도한 바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당국의 의도와는 다른 청년 세대들의 관심 자극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동시에,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고립, 그리고 평양축전 등으로 가속화된 재정 위기와 에너지 수급 문제 등이 1990년대 초의 배급제 이완을 가져왔습니다.

요컨대 북한 당국이 풀어놓은 외부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가치(관념)문화’의 부분적 변동과, 경제적 곤란과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 등으로 인한 ‘물질문화’의 변동이 맞물리게 된 것 같습니다”.

북한 청소년들의 가치관 변화추이에 대한 질문을 하자 이인정(공주교대 강사, 북한학) 박사의 답변이 곧 이어졌다.

“북한을 탈출해 우리사회로 온 탈북자만도 1만2천여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단 한사람이라도 위장된 인원이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안보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한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에 북한에서 발행된 각종 문헌과 자료를 연구하면서도 탈북자들과도 자주 접촉하고 있다는 이 박사는 우리사회 안보불감증을 우려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 2004년「북한 새 세대의 가치지향 변화」를 중심으로 박사 학위논문을 받기도 한 이인정 박사는 북한 청소년들의 가치관 변화와 일탈현상을 사례를 들면서 설명했다.

이 박사와의 인터뷰는 지난 8월27일 향군 본부 회의실에서였다. 1시간 가량 이어진 이 날 인터뷰에서 이 박사는 자신을 지도한 이온죽 교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내 비쳐 사제간의 정이 돈독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 이인정 박사. 북한 청소년들의 가치관 변화를 중심으로 말을 하고 있다. ⓒkonas.net


다음은 이인정 박사의 인터뷰 전문내용임. (Konas)

▲ 안녕하세요 박사님.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 반갑습니다. 작년에는 서울대학교 통일학 연구소에서 공동연구로 북한의 근로단체(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조선민주녀성동맹)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공주교육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에서 도덕교육론과 북한학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또 재학생과 졸업생 중심으로 중등교사 임용 관련 강의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 박사님은 북한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 = 북한학 관련 연구는 1995년경 부터 관심을 가졌으며, 지도교수이신 이온죽 교수의 선구자적인 일차자료 분석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1996년에는 세종연구소에서 백학순 박사, 이종석박사와 함께 조교로 참여하면서 탈북민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1997년 석사학위논문은 “남북한 사회통합을 위한 전통문화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서, 그 당시로서는 북한의 일차 자료 입수가 쉽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연구가 드문 편이었습니다.

▲ 요즘 학생들의 북한에 대한 생각과 박사님이 공부하던 당시의 북한에 대한 생각과의 차이가 있는지?

==1990년대 중후반에는 일차자료의 입수가 힘들었고, 대학생들보다는 기독교 등의 선교단체 등이 북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던 특징이 있습니다. 이후 최근으로 오면서 남북공동선언문과 남북 교류 증진으로 인해 북한 사회 자체에 대한 사회 전반의 관심도가 높아진 특징을 보입니다. 다만,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나 주민들의 생활상에 대한 순수한 관심은 과거 세대에 비해 조금 감소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세대에 비하여 달라진 점은, 북한 사회에 대한 관심과 북한 당국자들에 대한 관심을 분리하여 이해하려는 태도가 증가한 듯 합니다.

▲ 북한은 우리에게 주적개념의 대상이자 미래사회에 함께 가야할 동반자이기도 한데요, 학문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에서 진단을 하신다면?

== 정치, 정책, 안보적 측면의 북한 연구와, 사회나 문화적 측면의 북한 연구가 모두 균형 있게 발전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최근 들어 다소 진보적 이념이 주류를 이어 온 사례들이 발견되며, 북한에 대한 시민단체들 차원에서의 관심이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안보적 측면과 미래 통일 사회에서의 통합적 번영과 관련된 북한 연구가 다소 위축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안보적 측면에서의 북한 연구가 ‘수구’나 구태의연하다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더욱 내실 있는 연구들이 진행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단순히 북한사회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들을 넘어서, 학제적이고 통일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북한 연구 시도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예컨대 통일대비 차원에서 교육과정의 비교 연구나, 다문화 교육적 차원의 남북한 통합 관련 연구, 평화교육을 비롯하여 다양한 새로운 개념들을 접목한 새로운 각도의 통합교육과 통일교육, 통일사회의 발전적 안보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이인정 박사. ⓒkonas.net


▲ 과거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혁명1세대와 최근 사회변화과정에서 큰 차이점이 있을 수 있겠지요? 특히 요즘 북한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 정체성이나 자기 가치관 변화에도 차이점이 클 것으로 보는데요?

== 어느 나라에든지 전후세대들의 경우에는 가치 선호의 서열이 과거 세대들과는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의 경우 급속한 사회발전을 거치면서 세대 간의 차이나 갈등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말 이후 최근의 북한 사회는 그 변화의 폭과 강도가 더욱 강하며 급속히 이루어지게 되면서, 그 전의 세대들과 현 북한 청년들의 가치 특성이 더 큰 차이를 보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김일성’에 대한 신뢰나 존경심은 세대를 초월하여 높게 상징화되어 있는 듯하나, ‘김정일’에 대한 입장은 구세대의 경우에도 상대적으로 그 권위가 낮게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북한의 새 세대들에게도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혁명의 제 3, 4세대인 새 세대들에게는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지지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탈북민 인터뷰 등에서 확인된 바로는, 탈북자들에게 열려 있기만 하다면 미국이나 특히 일본 등지로 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舊 소련이나 북한 당국이 설치한 철로와 전신주는 금방 망가지되, 과거 일제 치하에서 일본이 건설한 철길과 전신주는 아직도 튼튼하다면서 칭찬을 한다고 합니다. 즉 북한 당국의 회상기학습 등의 교양시도와는 달리, 현 젊은 세대들의 미국과 일본에 대한 태도는 그다지 공격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태도는 청년 대상 교양을 시도하는 [청년전위] 등의 일차자료에서도 확인되는데, 서구 제품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고 교양하는 내용이 증가한다는 데에서도, 서구나 일본, 남한에 대한 청년 세대들의 이미지가 과거와는 다른 우호적 측면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음을 입증한다고 생각합니다.

▲ 박사 학위논문도 ‘북한 새 세대의 가치지향 변화’를 중심으로 했는데, 설명 좀 해주시지요.

== 북한 새 세대들은 특별히 1990년대 중후반의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겪기 이전 시기에서부터 가치지향에 있어서 변화를 보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북한의 [청년전위] 신문 기사 등에서는 1990년대 초에서부터 이미 ‘물질주의,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적인 경제적 가치 특성, ‘개인리기주의, 도시 선호’ 등의 사회적 특성, ‘패싸움’ 등의 일탈적 특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기사에 등장하는 ‘가치특성’에 대한 빈도분석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는 거의 발견된 적이 없던 ‘돈, 돈지갑, 사치품’ 등에 대한 언급이 1990년대 초에는 최고 빈도로 등장합니다.

또한 1980년대까지는 ‘나태, 안일’ 등과 같은 소극적 일탈의 언급이 높았던 것과 달리, 1990년대 초에는 ‘패싸움, 무리지어 몰려다님, 폭력’과 같은 적극적 일탈의 표현이 ‘돈’에 대한 빈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언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지향의 변화 시점은 1990년대 중반의 경제적 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1980년대 말 이후 동구권의 붕괴와 1989년의 평양 축전 등으로부터 촉발된 외부적 변동과 문물 유입에 기인하는 부분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1990년대 중후반을 거쳐 2000년대에는 기존의 이러한 1990년대 초의 일탈적 특성과 변동특성이 ‘서구 문화에 대한 환상, 과시형 결혼문화’ 등의 ‘사회문화’적 측면의 변화로 고착되어가는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 북한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가치변화가 어디에서 기인되며, 그 변화 양상과 앞으로의 변화추이는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요?

== 북한 사회는 동일한 리더십과 낮은 사회변동, 폐쇄적 체계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여타 국가에 비해 젊은이들의 가치 변화 가능성이 낮은 사회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88년의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경쟁적으로 진행하였던 1989년의 평양축전 준비과정에서 매우 적극적 양식으로 서구적 문물에 대한 수용을 정부당국 차원에서 시도한 바 있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당국의 의도와는 다른 청년 세대들의 관심 자극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동시에,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고립, 그리고 평양축전 등으로 가속화된 재정 위기와 에너지 수급 문제 등이 1990년대 초의 배급제 이완을 가져왔습니다. 요컨대 북한 당국이 풀어놓은 외부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가치(관념)문화’의 부분적 변동과, 경제적 곤란과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 등으로 인한 ‘물질문화’의 변동이 맞물리게 된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아노미적 가치 혼란이 증가하고 사회 범죄와 일탈행위가 증가하였던 것이 1990년대 초 시기입니다. 나아가 김일성의 사망과 연이은 3년간의 수해 및 식량구입을 위한 중국으로의 이탈과 정보의 유입은 총체적인 혼란을 초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1998년 이후의 공식적인 ‘고난의 행군’ 종료 선언과 그 이후 2000년대에는 당국의 교양 강화 시도가 다시금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는 결국 ‘제도문화’의 측면에서 변동성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결국 1998년 사회주의 헌법에서의 사유재산 인정 구절이나, 7.1조치 등과 같은 경제적 측면의 제도적 변화가 발생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부분적으로나마 아래로부터의 변동이 당국의 ‘위로부터의 변동’을 촉발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은 향후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 노노데모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고. ⓒkonas.net


▲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때 미녀 응원단이 방문해 반향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이들이 김정일 비하 현수막을 보고 태도를 일변한 적도 있습니다. 북한 체제에 대한 측면과 개인 가치관 측면에서 어떤 상관관계나 차이점이 있을까요?

== 사람의 인격과 자아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은 ‘통합성’입니다. 이러한 통합성을 구성하는 데에는 가족, 종교와 같은 집단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소속 지역(고향)이나 국가와 같은 거시적 집단도 중요한 한 개인의 인격적 통합성을 구성합니다. 따라서 인지적으로는 외부의 정보나 혹은 비난이 이해가 간다 하더라도, 정서적인 선호와 애착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집단에 대하여 공격적 혹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문화 지체 이론에서처럼, 물질적 측면에 대한 수용은 비교적 큰 저항 없이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가치 혹은 제도와 같은 비물질적 측면은 그 수용 속도가 더딜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오랜 동안 받아 왔던 사상 교육은, 우리로 말하면 어린 시절부터의 밥상머리 교육이나 부모의 정치적 선호, 가족과 종교 차원에서 주입되고 형성되어 온 가치관이 한 개인에게 중요한 제한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북한 청소년들이 황금만능 풍조나 외제물건 선호 현상이 나타난다는데 당연한 처사이기도 하겠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능할까요?

== 오랜 동안 동구 사회주의 국가나 舊 소련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매우 흔하게 나타났습니다. 동서독 교류에 있어서도 서독의 시트콤이나 오락프로그램 등이 동독 지역에 수입되어 보급되면서, 잠재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가치 변화를 촉발한 적이 있습니다. 즉, 시트콤에 등장하는 고가의 가구나 세트장, 오락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옷차림 등에 대한 선망이 특히 변화에 민감한 청년 세대들에게 강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동구와 소련 모두에서 물질만능주의는 ‘관료부패’나 ‘뇌물’, ‘공공기물의 사적 절취’ 등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발생해 왔습니다. 북한 역시 발생 시기는 늦을지언정 매우 유사한 방향으로, 그러나 상대적으로 더욱 급속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 북한 젊은이들과 우리 젊은이들과의 단순 비교라고 할까요? 우리 젊은이들도 국가에 대한 어떤 자기희생적 개념보다 개인주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데요, 어떻게 비교를 할 수 있을 까요?

== 다양하게 직업적 측면에서도 이런 특성은 일차자료 등에서 자주 지적되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대학생들은 모두 국가의 비용부담을 통하여 엄격히 선별되어 공부하는 계층이며, 미래의 당원이 될 핵심 계층에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평양’이기만 하면 직업의 종류에 대하여서는 상관이 없다라는 ‘도시선호’, 외국에 대한 선망, ‘먹을알 있는’ 직업 즉 외화벌이나 외국 관련 기업 취업을 강력히 희망합니다. 이러한 특성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전체주의적 직업관에서, 이기주의적 직업관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 특성입니다.

▲ 많이 길어졌습니다. 통일은 분단된 우리에게 가장 큰 시대적 소명인데 분단 극복을 위해 젊은이들이 지녀야 할 가치관이나 자세에 대해서는?

== 사실 북한 당국은 몇 가지 전략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1990년대의 위기를 겪으면서 북한은 ‘산업사회’의 단계의 완성을 포기하고 곧장 ‘정보화’ 사회에로 이행하여 국가발전을 꾀한다는 전략을 취하였습니다. 산업사회단계를 발전시키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투자와 인적교류가 불가피하되, 정보화 관련 산업은 핵심 인력들에 대한 집중 투자와 관리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부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습니다.

또한, 정상적인 경쟁의 구도로는 남한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핵을 비롯한 군사적 투자를 통하여 대외적, 대내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대남전략에 있어서도 경쟁이나 단순교류를 통한 방식이 아니라, 보수화되어 가고 고령화되어 가는 남한 내부의 특성을 염두에 두는 가운데, 남한의 젊은 층이나 학생계층을 공략하여 전략적 목표를 세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향후 대북 관련 교육이나 통일 교육에 있어서는, ‘미래’적 측면의 관점 뿐 아니라, ‘안보’적 측면의 교육 내용의 강화도 균형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노노데모’에도 관여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 노노데모에 가입하였던 이유는 우선 이세진 학생의 일인시위를 전해 듣고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 가장 컸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요인으로는 첫째, 한 나라의 최소 수혜자는 그 국가 전체의 발전과 번영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계층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서민층과 취업희망 계층들에게 가장 낙관적인 미래는, 다름 아닌 국가 발전에서 구상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혼란과 대외신인도 저하, 경제적 위기를 촉발할 위험이 있는 폭력 시위의 빈도와 양상이 높아지는 것은, 우리의 서민계층에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육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교우관계를 통한 우정과 학업에 대한 열정이 가장 중요할 시기인 학생 계층이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고 근심이 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교조가 지니고 있던 장점도 있었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방어 능력이나 충분한 판단력, 사실판단에 있어서 진위를 판명하기 어려운 영역에까지 학생 계층이 내몰려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고민 가운데, 과격 불법 촛불시위를 반대하는 노노데모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코나스넷 http://www.konas.net/2008.9.3]

Posted by no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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