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보]

노병례 씨,

“‘건국대통령 이승만 동상’ 광화문에 세우기” 1인 시위

“‘敬天愛人의 國父 李承晩의 동상이 光化門에 세워져야 大韓民國이 살아난다!”

촬영 이상천 리포터 @No1times

인당 노병례(忍堂·盧炳禮, 89세,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는 광화문 일대 번화가와한국프레스센터 등 집회장에자주 나타나 1인 시위를 하는 인물이다.

기독교 청도교신앙의 정신으로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동상 광화문 건립을 주장하고 있다. 그가 자비 제작한 ‘진리와 자유의 메신저 <平和의 正論(The Message df Peace)>’이란 제호의인쇄물은 금년 5월에 이미 235호의회수를 기록,발간해 배포하고 있는 중이다.











촬영 이상천 리포터 @No1times

찾아가는 뉴스미디어 넘버원타임즈

[2011. 6. 2. www.No1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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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펠러의 삶 ♣

룩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55세에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룩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룩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는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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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로 온 어느 여대생의 글

(편집자 註) 경제학을 연구하는 어느 여대생의 글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장래는희망이 있습니다.

경제학을 연구하는 어느 여대생의 글(Mail 全文)



 저는 젊은 20대 여성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 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 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 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 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 말로 한국을망친 창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 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이었으므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 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 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 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이라는 단기간 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전쟁국가에서 20년 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 만 하다.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며,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 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친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 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이제야 알았습니다.

경제학을 연구하는 어느 여대생의 글(Mail 全文)



 저는 젊은 20대 여성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 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 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 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 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 말로 한국을망친 창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 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이었으므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 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 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 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이라는 단기간 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전쟁국가에서 20년 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 만 하다.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며,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 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친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 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이제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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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각과 길상사]

기생 김영한과 북한시인 백석의 애절하고 뜨거운 사랑이야기

◈三角山 吉祥寺를 찾아서◈


(옛 대원각)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산기슭에 위치

길상사된 아름다운 사연이 깃든곳

옛 "대원각"을 찾아

기생 김영한과 북한 시인 백석의 사랑

아름다운 삶의 얘기가 깃들어 있는곳

대원각과 길상사, 애절하고 뜨거운 사랑이야기

시인 백석과기생 지향, 그런 얘기의 원류를 찾아

서울 성북구 성북동길상사를 찾았습니다.

법정스님이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하셨다는

뉴스를듣기전까지 저는 길상사를 몰랐습니다.

법정스님이 왜 길상사에서

입적하셨으며 길상사는 어디인가?

배우고익히며 길상사를 찾아 이 글을 올립니다.

삼선교역이라고도 하고 한성대역이라고도하는 곳에서

내려 6번출구에서 20분 남짓걸어서 닿은곳이길상사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곳을찾고 있었습니다.

처음 찾는분들이

거리에서 길상사 가는 길을 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산기슭 7, 000평의 부지 위에 극락전과

일주문을 비롯해서 40여동의 절 건물이 있습니다.

이곳이 196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그 유명하던 요정

"대원각"이었습니다.

그 주인은 호를 자야라고 하던 〔김영한〕여사였습니다.

신문에 글도 기고하고 40넘어 중앙대학을 나오고

영원히 만나지 못하면서도 젊은날의 사랑하던 이를

일생동안 마음에 안고 살았습니다.

삼청각, 청운각, 대운각, 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유명했던 요정이, 절(寺)로 변한겻은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감명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987년부터 〔김영한〕 여사의 시주를 위한 끈질긴

요청으로 1995년 길상사가 순천송광사의 말사로

등록됨에 따라대원각이→길상사로 되고,

【김영한 여사가】

일생동안 사랑하던 북한시인 백석을 기념하는

문학상 제정을 위해 2억원을 내 놓았습니다.

남은재산은 과학도를 위해 써달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1999년 11월 14일 세상을 뜨셨습니다.

대원각은 그때 시가로 1, 000억원이었으니

지금으로 보면 훨씬 더 값나가는 재산일 줄 압니다.

김영한여사가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에는

이 나라 과학도들을 위해

써 달라고 한 재산은 122억원으로 평가 되었습니다.

일생동안모은

재산은 모두 세상에 내 놓고 맨손으로 새상을 떠나재가 되어

길상사 경내에 뿌려__습니다.

길상사에는 흔히 지나쳐

버리기쉬운곳에 자그마한 공덕비가 섰습니다.

한 많은 인생, 가난속에서 테어나 16살때

팔려가다싶이 해서 만난 남편,

자살로 세상 뜨고 마지못해 기생이 되었습니다.

기생 생활 하다가 만난 애인, 백석은

그러나 신랑 집에서

기생과는 살수 없다는 부모님들의 성화에어쩔수 없이

그 색시와 결혼을 했어도 백석은 자야에게서 지냈고

만주에 가서살자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야는자신보다도 백석을 위해

만주에 가는것을사양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 백석은 결국 홀로 만주에 있다가

해방되어 나라가 두동강 나니

영원한 이별이라

그래도

그 만을 사랑하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한번 맺은 인연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변치않고 살다간

시인 백석과의 사랑 이야기는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그와의 깊은 사랑으로 일생을

혼자 살았습니다.

그를 위해 글을 썼고

2억원을 출연해서문학상을 제정했습니다.

아들, 딸 없이 혼자 살다가 재산 모두 내 놓고

무덤도 남기지 말라며 세상을 떠나 재로 뿌려졌습니다.

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숭고한 그의 정신을 기리며 이 글을썼습니다.

더 자세한 얘기들은 다른 분들이 쓰신 글이 많으므로

간단한 프로필을 올리고

길상사 사진을 올리는것으로 가름 합니다.

1916년 서울 태생

1931년 첫 남편 만나 얼마후 자살

권번 기생수업

1936년경 백석을 만남 (백기행-1912-1994)

1939년 백석 신경으로 감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

1987년 미국 채류 법정 스님께 대원각 시주의사 밝힘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 『내 사랑 백석』을 펴냄

1995년대원각을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로 등록

1997년‘"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음)

1997년 사재 2억을 출연, 백석문학상 제정(창작과 비평사 주관)

1999년 11월 14일 사망

1999년 12월 유언장 공개 전재산 과학도들을 위해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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