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칼럼]
 
입학사정관 전형을 앞둔 사람들에게 면접 공통 어드바이스
 
 

이창호 대한명인(연설학)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자기표현이며, 현대의 경영이나 관리는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말하여 면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작금 전국 대학에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사소하고 하찮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때로는 ‘부당할 정도’로 면접관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학생들의 의사소통에 기본인 인품, 언행, 지식의 정도 등을 알아보는 입학사정관 전형과 면대면 시험을 통과해야 당당하게 입학 성공할 수 있다. 2013학년도 대학 입시 수시모집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을 실시하는 대학은 125개다. 총 선발인원은 4만6337명으로 지난해보다 7406명 늘었다고 한다. 입학사정관 전형이 수시모집에서 주요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전공 계열에 따라 면접 준비 방법도 차별화 되어야 한다. 이제는 대학별 입시전형에 따른 다양한 방법으로 합격의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수시전형을 찾아 다양한 지원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합격확률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문 계열은 사회, 국사, 윤리, 철학, 외국어, 문학, 국어 쪽을 심도 있게 질문하므로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 학습해 두어야 한다. 또한 자연 계열은 수학과 과학에 대한 부분을 심도 있게 질문하므로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한다. 그리고 전공과 관련된 연구 분야, 관련 학문, 발전 방향, 연구 방법론, 대표적인 학자들에 대해서 미리 알아보는 것은 계열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준비해야 할 부분이다. 금년에도 입시의 대세가 정시보다는 수시에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면접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듣기’와 ‘말하기’ 소통의 기술에 대해 먼저 배우고 익혀야 한다. 말하기와 듣기의 바람직한 습관과 태도를 다음과 같이 이창호스피치(LEECHANGHO SPEECH)에서는 주장을 한다.

첫째, 학교생활에서 접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말하기와 듣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모든 의견을 수용하려는 개방적 자세와 문제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때 우리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어떤 말을 행동에도 신뢰를 받을 수 없으며, 신뢰감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셋째, 면접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되,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는 내용이 주제에 합당한가,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진실성이 있는가, 실현 가능한 것인가, 그보다 더 좋은 의견은 없는가. 등을 따져가며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의 입장과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답문이 시작되면 침착하고 밝은 표정으로 질문자를 바라보며 질문을 듣고 똑똑한 발음으로 대답한다. 말의 억양은 면접관으로부터 활기차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여 면접관에게 신뢰감을 주도록 해야 한다. 또한 대답을 잘못했다 하더라도 머리를 긁적이거나 혀를 내 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에는 고개를 푹 숙이거나 얼굴을 위로 올려다보는 행동은 피해야 하며, 질문 내용을 잘 못 들었을 때에는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용기 내어 다시 물어서 대답하도록 한다. 특히 대답을 할 때는 ‘에~,’ ‘저~’등의 불필요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며 너무 빨리 말하거나 우물쭈물하지 말고 말끝을 흐리지 않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있다고 너무 큰소리로,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말하지 말고, 간단명료하게 간추려서 요령 있게 대답 하도록 하며 빨리 대답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너무 오래 끌거나 지루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 ‘잠깐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하고 말한 다음 잠시 생각하고 나서 분명한 어조로 확신 있게 말한다.

 글/ 이창호(李昌虎)대한명인(연설학)/ 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www.speechkorea.org) 대표/ 한국청소년봉사단연맹 부총재/ 스피치소통전문교육사 1급/ 제 3회 대한민국 나눔 대상 수상 <대표도서> 스피치 달인의 생산적 말하기. 외 17권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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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30. www.No1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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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고” 북한이탈주민돕기 “Turn-It-Off” 캠페인개최

이상천 리포터 @No1times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절약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가운데, 인천국제고등학교 학생들이 이번에는 에너지 절약을 통한 북한이탈주민 돕기 캠페인 “Turn-It-Off”를 벌여 화제다.

인천국제고등학교 동아리 연합이 추진한 이번 캠페인은 5월 25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전년도 대비 절약된 전기 요금을 북한이탈주민들을 돕는 데 사용하는 방식이다. 특별히 이번 캠페인은 “열린북한방송”이 함께하여, 절약된 전기 사용료 전액을 후원한다.


인천국제고 동아리 연합에 따르면 캠페인 결과 총 252,206원이 절약되었으며, 토의를 거쳐 성금의 활용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캠페인은 특히 페이스 북을 통한 홍보가 돋보였다. 234명이 가입한 페이스 북의 Turn-It-Off 페이지는 매일 아침 학생들에게 에너지 절약 현황과 총 절약금액을 공지했다. 홍보를 담당한 성채윤(2학년)학생은 “인천국제고 학생들 대부분이 페이스 북을 이용한다는 점을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고 전했다.

인천국제고 동아리연합 회장 김현중(3학년) 학생은 “이번 캠페인의 특성상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절대적이었다. 형식적인 캠페인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몸소 실천할 수 있는 캠페인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평화 통일 동아리 INKPU의 회장 노지은(2학년) 학생은 "우리 사회의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에너지 절약에 대한 인식 뿐 아니라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인천국제고 동아리 연합은 인천국제고 평화통일 동아리 INKPU, 인권동아리 Enlighten, 외교동아리 I-ROK, 사이버 외교동아리 VANK, 유네스코 동아리로 구성된 동아리 연합체로 지난 3월 중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서명운동을 추진한 바 있다.

이상천 리포터 @No1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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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8. www.No1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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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설 즐겁게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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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대통령의 美國 國賓 旅行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적 비극입니다.

이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1948-1960)하던 기간 중 정치적 독재에 흐르고 장기집권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으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나무를 심고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냄으로써 대한민국을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번영하는 선진대국(先進大國)으로 키워내는 토대를 구축한 그의 위대한 업적은,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의 과실(過失)을 가지고 시야비야(是也非也)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그를 상대로 심지어 ‘친일(親日)▪친미(親美)’의 누명을 씌우는 좌파(左派) 세력의 인격살인(人格殺人)에 동참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역사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고 모독입니다.

어째서 왜곡이고 모독인가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글을 여기 소개합니다. 이 감동적인 글은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을 역임한 이헌표 선생이 1954년7월26일부터 8월13일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 80세의 노(老) 대통령이 19일간에 걸쳐 전개한 외교활동을 엮어서 34회에 걸쳐서 <국방일보>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 글은 방미 기간 중 이 대통령이 행했던 모든 연설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그 동안 사장(死藏)되었던 역사적 진실에 눈을 뜨고 왜곡된 사관(史觀)을 교정(矯正)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2년1월1일

李東馥 올림


연재를 시작하며(1)

“나를 좀 우리나라에 데려다 달라”

1965년 7월 21일(수요일) 저녁, 어느 여인이 울면서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교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 나이 64세로 보기에는 너무도 늙고 병약해 보이는 벽안의 여인이 31년이라는 영욕의 세월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려고 힘든 발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세 연상의 남편, 90세에 가까운 노령으로 병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지아비를 3년 반 이상 극진히 간호하면서 그녀의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더구나 남편이 영면하기 전 1주일 동안은 잠을 거의 못 이뤘던 그녀는 1965년 7월 19일 새벽 0시 35분, 싸늘하게 변해 버린 ‘파파’(평소 그녀는 남편을 이렇게 불렀음)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식음을 못하고 혼절을 거듭하다가 양자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하얀 한복을 입고 반듯이 빗어 올린 머리칼, 검은 실 핀으로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꽉 조인 모습. 그리고 통곡하지 않고 오른 손에 흰 장갑을 낀 채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범상치 않은 행동은 그녀의 품격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첫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여사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남북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와 투쟁하던 그는 사랑하는 ‘마미’(이승만은 평소 아내를 이렇게 불렀음)를 두고 그렇게 떠났다. 향년 만 90세.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후,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하와이에서 인생의 마지막 5년을 보냈다. 1913년부터 1938년까지 하와이에서의 망명생활을 포함하면 그는 무려 30년을 하와이에서 보냈다. 공교롭게도 조국인 한국에서 45년,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에서 45년을 살았던 이승만에게 미국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빼앗겨 40년을 망명생활하면서 느꼈던 향수보다도,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하와이에서 보냈던 5년 동안 더욱 애절하게 고국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이 시절,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좀 우리나라에 데려다 달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살아서 조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하와이 현지시각), 이승만의 유해는 미군 의장대의 호송을 받으며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로 향했으며, 미 공군수송기에 실려 조국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마미’는 그곳에 남겨 두고!(프란체스카는 그 5년 후인 1970년에 귀국해 1992년 서울에서 서거했음)

 7월 22일, 김포공항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시신을 영접했으며 장례는 7월 27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국립묘지로 가는 그를 전국에서 모인 수십만의 국민들이 애도했다.

 당시 이승만의 장례 형식을 놓고 국장·국민장·사회장 등 논란이 빚어졌듯이, 주검이 돼 돌아온 그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것은 어제의 일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우리 사회 내에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며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하든 비난하든 우리가 알아둘 것이 있다. 이승만은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와 함께 호흡을 해 오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美 골동품 상점서 뜻밖의 책 발견

 이승만만큼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인물을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조국 독립의 구심점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국가의 건국과 발전을 위해서 남달리 헌신했다.

 반면에 그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에 장기집권을 도모했다. 그러다 보니 억지 개헌과 부정선거를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60년 4·19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고, 많은 젊은이들을 피 흘리며 쓰러지게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내외에서 이승만에 대한 수많은 저작물이 제작됐다. 그중에는 그를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이들의 기술이 담긴 중요한 저작물들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과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제3자의 입이나 글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그를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구체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생산되며, 첨단 미디어가 이런 정보를 넓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확산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평가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직접 접촉하고 교류했던 사람이 평가하는 것도 힘들거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랴! 이는 정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오늘부터 선보이게 되는 연재물은 이승만에 관한 저작물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저작물은 아주 특이한 존재다. 잠시 연재물이 등장하게 된 책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이야기를 2005년으로 돌려야겠다. 필자는 당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초 골동품 상점을 찾았다가 뜻밖의 책을 만났다. “President Rhee Syngman’s Journey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여행)”라는 제목의 영어 원서였다.

 대한민국 공보처가 발간한 책으로 195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18박 19일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 행적이 많은 사진들과 함께 수록돼 있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으나 그 책은 처음 봤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에는 소장자가 보관하기 위해 꽂아 둔 특이한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다. 6·25전쟁 직후, 피란지에서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었다.

 사진을 처음 대하는 순간 실망스러웠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왜 우리 대통령은 총이나 칼을 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그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태극기를 들고 있을까? 그것도 1949년 법률로 정해진 태극기와 비교해 볼 때 태극과 괘의 모습이 사뭇 다른, 어느 장롱 속에서 꺼내 온 것 같은 태극기를!

 그날 밤, 필자는 그 사진을 책갈피 삼아 밤새도록 책을 읽으며 너무도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간 알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 극히 낮았던 그 시절, 그는 미국을 국빈 방문해 당당하게 미국 정치지도자들에게 한반도의 미래를 설파하고 있었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 미국 여행' 책 통해 다시한번 조명

 책 읽기를 마치고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곰곰이 살펴봤다. 처음 접했을 때 느껴졌던 실망스러운 감정이 이번에는 연민과 애정으로 변해 있었고, 그분의 용기와 배짱이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이 책을 나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한 번쯤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교재 중 하나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이후 5년 이상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이제 감히 국방일보 지면을 통해서 그 책의 내용과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던 자유와 정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비전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때 책을 읽으며 필자가 느꼈던 그 감동을 되살리며!

- 미국 방문 배경(2)편이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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