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晩 대통령의 美國 國賓 旅行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민족적 비극입니다. 이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1948-1960)하던 기간 중 정치적 독재에 흐르고 장기집권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이끌었으며 이 땅에 민주주의의 나무를 심고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냄으로써 대한민국을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번영하는 선진대국(先進大國)으로 키워내는 토대를 구축한 그의 위대한 업적은, 장공속죄(將功贖罪)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의 과실(過失)을 가지고 시야비야(是也非也)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그를 상대로 심지어 ‘친일(親日)▪친미(親美)’의 누명을 씌우는 좌파(左派) 세력의 인격살인(人格殺人)에 동참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역사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고 모독입니다. 어째서 왜곡이고 모독인가를 밝혀 주는 귀중한 글을 여기 소개합니다. 이 감동적인 글은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을 역임한 이헌표 선생이 1954년7월26일부터 8월13일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한 80세의 노(老) 대통령이 19일간에 걸쳐 전개한 외교활동을 엮어서 34회에 걸쳐서 <국방일보>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 글은 방미 기간 중 이 대통령이 행했던 모든 연설문을 담고 있는 소중한 사료(史料)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그 동안 사장(死藏)되었던 역사적 진실에 눈을 뜨고 왜곡된 사관(史觀)을 교정(矯正)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2012년1월1일 李東馥 올림 |
연재를 시작하며(1)
“나를 좀 우리나라에 데려다 달라”
1965년 7월 21일(수요일) 저녁, 어느 여인이 울면서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교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 나이 64세로 보기에는 너무도 늙고 병약해 보이는 벽안의 여인이 31년이라는 영욕의 세월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려고 힘든 발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세 연상의 남편, 90세에 가까운 노령으로 병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지아비를 3년 반 이상 극진히 간호하면서 그녀의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더구나 남편이 영면하기 전 1주일 동안은 잠을 거의 못 이뤘던 그녀는 1965년 7월 19일 새벽 0시 35분, 싸늘하게 변해 버린 ‘파파’(평소 그녀는 남편을 이렇게 불렀음)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식음을 못하고 혼절을 거듭하다가 양자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하얀 한복을 입고 반듯이 빗어 올린 머리칼, 검은 실 핀으로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꽉 조인 모습. 그리고 통곡하지 않고 오른 손에 흰 장갑을 낀 채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범상치 않은 행동은 그녀의 품격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첫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여사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남북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와 투쟁하던 그는 사랑하는 ‘마미’(이승만은 평소 아내를 이렇게 불렀음)를 두고 그렇게 떠났다. 향년 만 90세.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후,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하와이에서 인생의 마지막 5년을 보냈다. 1913년부터 1938년까지 하와이에서의 망명생활을 포함하면 그는 무려 30년을 하와이에서 보냈다. 공교롭게도 조국인 한국에서 45년,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에서 45년을 살았던 이승만에게 미국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빼앗겨 40년을 망명생활하면서 느꼈던 향수보다도,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하와이에서 보냈던 5년 동안 더욱 애절하게 고국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이 시절,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좀 우리나라에 데려다 달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살아서 조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하와이 현지시각), 이승만의 유해는 미군 의장대의 호송을 받으며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로 향했으며, 미 공군수송기에 실려 조국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마미’는 그곳에 남겨 두고!(프란체스카는 그 5년 후인 1970년에 귀국해 1992년 서울에서 서거했음)
7월 22일, 김포공항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 그리고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시신을 영접했으며 장례는 7월 27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국립묘지로 가는 그를 전국에서 모인 수십만의 국민들이 애도했다.
당시 이승만의 장례 형식을 놓고 국장·국민장·사회장 등 논란이 빚어졌듯이, 주검이 돼 돌아온 그를 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것은 어제의 일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우리 사회 내에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며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하든 비난하든 우리가 알아둘 것이 있다. 이승만은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와 함께 호흡을 해 오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美 골동품 상점서 뜻밖의 책 발견
이승만만큼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인물을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조국 독립의 구심점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국가의 건국과 발전을 위해서 남달리 헌신했다.
반면에 그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에 장기집권을 도모했다. 그러다 보니 억지 개헌과 부정선거를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60년 4·19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고, 많은 젊은이들을 피 흘리며 쓰러지게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내외에서 이승만에 대한 수많은 저작물이 제작됐다. 그중에는 그를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이들의 기술이 담긴 중요한 저작물들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과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제3자의 입이나 글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그를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구체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생산되며, 첨단 미디어가 이런 정보를 넓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확산시키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평가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직접 접촉하고 교류했던 사람이 평가하는 것도 힘들거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랴! 이는 정말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오늘부터 선보이게 되는 연재물은 이승만에 관한 저작물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저작물은 아주 특이한 존재다. 잠시 연재물이 등장하게 된 책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이야기를 2005년으로 돌려야겠다. 필자는 당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초 골동품 상점을 찾았다가 뜻밖의 책을 만났다. “President Rhee Syngman’s Journey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여행)”라는 제목의 영어 원서였다.
대한민국 공보처가 발간한 책으로 195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까지 18박 19일 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 행적이 많은 사진들과 함께 수록돼 있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으나 그 책은 처음 봤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에는 소장자가 보관하기 위해 꽂아 둔 특이한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다. 6·25전쟁 직후, 피란지에서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었다.
사진을 처음 대하는 순간 실망스러웠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왜 우리 대통령은 총이나 칼을 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 못하고, 그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태극기를 들고 있을까? 그것도 1949년 법률로 정해진 태극기와 비교해 볼 때 태극과 괘의 모습이 사뭇 다른, 어느 장롱 속에서 꺼내 온 것 같은 태극기를!
그날 밤, 필자는 그 사진을 책갈피 삼아 밤새도록 책을 읽으며 너무도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간 알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 극히 낮았던 그 시절, 그는 미국을 국빈 방문해 당당하게 미국 정치지도자들에게 한반도의 미래를 설파하고 있었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 미국 여행' 책 통해 다시한번 조명
책 읽기를 마치고 태극기를 들고 서 있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곰곰이 살펴봤다. 처음 접했을 때 느껴졌던 실망스러운 감정이 이번에는 연민과 애정으로 변해 있었고, 그분의 용기와 배짱이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이 책을 나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한 번쯤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교재 중 하나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이후 5년 이상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이제 감히 국방일보 지면을 통해서 그 책의 내용과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던 자유와 정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비전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때 책을 읽으며 필자가 느꼈던 그 감동을 되살리며!
- 미국 방문 배경(2)편이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