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 24. 03:26
밥없이 살아도 라면 없이 못살아!…라면의 변천사
# 인재를 키워낸 음식?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 육상스타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임춘애는 메달을 획득한 후 가난했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라면만 먹고 달렸다"는 말로 대신해 국민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임춘애 뿐만 아니라 어렵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라면으로 채우며 오늘보다 풍요로운 내일을 위해 노력을 거듭했다는 말을 자주하곤 한다.
아나운서 이계진도 그의 책에서 "라면은 예비고사 수석과 고시 합격자를 숱하게 배출시킨 음식이기도 하지만 방송의 질을 높이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며 야근 때마다 즐겨 먹던 라면에 대해 회상했다.
그러나 라면은 이제 먹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눈물을 삼키며 주린 배를 채우던 가슴 아픈 음식이 아니다. 화려한 포장과 색다른 맛으로 청소년들에게도 사랑 받는 것은 물론,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고 있는 효자 상품으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 꿀꿀이죽 대신 라면을
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처음 발매된 때는 1960년대. 당시 보험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삼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이 일본의 한 포장마차에서 끓여 주던 라면을 먹게 되면서부터.
남대문 시장에서 파는 지저분한 꿀꿀이 죽 대신 라면을 대용식으로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전회장은 상공부를 어렵게 설득하여 공장 설비 자금을 마련하고, 일본 묘조(明星)식품에서 시설과 기술을 도입하여 1963년 9월 드디어 '삼양라면'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의 삼양라면은 미곡 중심의 식생활에 익숙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다지 즐겨 먹지 않던 면류였고 맛 또한 너무 싱겁고 느끼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더구나 먹는 음식이 아니라 옷감의 일종인 '라면(羅綿)'으로 오해한 사람들도 많아 판매에 더욱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원 가족들까지 총동원하여 서울역이나 남대문 시장 등에서 무료 시식을 계속하며 끈질기게 판매를 유도한 끝에 결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잡아당기기 시작했고, 1965년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혼분식 장려 정책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제2의 주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라면이 이렇게 많은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싱겁고 느끼한 맛 대신 얼큰한 맛의 스프를 개발하여 국에 익숙한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추었고, 번거롭게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물과 김치만 있으면 언제든지 훌륭하게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간편함 때문이었다.
당시 삼양라면은 소비자들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발매 초기의 누적된 적자를 말끔히 씻고 봉지당 10원이라는 판매가와 1원 미만의 낮은 이윤에도 불구하고 1965년 7월 한 달에만 100만 봉지를 판매하는 등 탄탄대로의 성장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삼양라면은 현재 농심으로 상호를 변경한 '롯데라면'을 비롯해 '해표라면(동방유량)' '닭표라면(신한제분)' '해랑라면(풍국제면)' 등 유사업체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국내 최대의 라면 회사로 입지를 굳힌 농심은 당시 롯데 공업 주식회사에서 '롯데라면'을 발매하며 판매 경쟁에 참여하였으나 선발 업체의 시장 장악력이 워낙 뛰어나 판매율을 신장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같은 어려움 때문에 롯데라면을 제외한 유사 업체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 한 그릇에 모든 영양이 듬뿍?
라면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으로 꼽히는 것은 중국에서 즐겨 먹던 '건면(乾麵)'을 일본인 사업가 안도 시로후쿠라가 밀가루 튀김을 만드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개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을 니신(日淸)식품에서 생산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으나, 이 시기에 판매된 것들은 조미 국수에 양념 국물을 가미한 것이었으며 스프를 첨가한 것은 1961년 묘조(明星)식품에서 개발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라면은 인스턴트 면류의 일종으로서 밀가루 또는 곡식가루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건조 식품이다. 기름에 튀긴 '유탕면', 기름에 튀기지 않고 건조시켜 만든 '건면', 식기로 사용하는 용기에 면을 넣어 별첨된 양념 스프를 첨가한 '즉석면' 등이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것은 대부분 기름에 튀긴 유탕면이며 성분을 살펴보면 소맥분이 83∼85%, 정제 유지가 15∼18%, 정제염 1∼2% 등으로 만들어졌다.
스프의 성분은 쇠고기, 간장, 글루타민산나트륨, 핵산 조미료, 포도당, 향신료, 마늘, 양파, 고추 등이 혼합되어 있으며, 유탕 과정에서 쓰는 기름은 주로 동물성 기름인 우지(牛脂)를 많이 사용했으나 인체에 유해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지금은 식물성 팜유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라면 제조 관계자들이 가장 서운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사용되는 원료들이 천연식품이 아니라는 일반인들의 인식과 장기간 먹을 경우 인체에 대단히 해롭다는 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라면 제조사 측의 한 관계자는 "라면은 몇백 원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되는 단일 음식으로는 가장 영양가가 높으며, 소비자들의 기호 역시 대단히 고급스러워 졌기 때문에 인공 재료를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또한 "어떤 식품이든 한가지만 계속 편식을 하면 탈이 나게 마련 아니냐"면서 "한 달간 계속 라면을 먹으면 위에 구멍이 난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라면은 원료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성분이 탄수화물이고 지방과 기타 성분이 소량으로 함유되어 있어 1봉지(120g)당 550kcal 정도의 고칼로리 식품. 제조 회사들은 천연 원료를 재료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많은 영양가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단일 식품으로서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야채나 고기와 함께 먹어야만 균형 있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
# 꼬불꼬불 라면의 변천사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로 발매된 삼양라면은 투명한 비닐 포장에 닭 그림과 함께 '닭고기국물로 맛을 냈다'는 광고를 내보내 관심을 끌었다.
한동안 '라면은 삼양라면'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70년대 초에 발매한 '삼양칼국수'는 '천연 원료를 사용한 가장 안전한 식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품목 다양화를 꾀한 제품이었다.
요즈음 발매되는 인스턴트 칼국수에 비하면 모양이나 맛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나 100g 한봉지에 30원의 가격으로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70년 '짜장면'을 시판한 삼양은 1972년 3월 7일에는 국내 최초의 용기면인 '컵라면'을 시판해 영업사원을 하려면 삼양으로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다.
도매상이나 대리점에서 미리 결재 준비를 해 놓고 수금 사원을 기다렸을 정도이며, 영업 사원들의 비위를 건드리면 장사를 그만 두어야 했기 때문에 타 회사 직원들에게 삼양식품의 영업사원은 스트레스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1970년에 발매된 '짜장면'은 당시 외식으로 가장 즐겨 먹던 짜장면을 즉석에서 먹을 수 있도록 개발해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가격은 120g 한 봉지에 25원. 이듬해에 발매된 '치킨면'은 고기를 먹는 일이 흔하지 않았던 소비자들에게 카레 맛까지 가미시킨 색다른 맛으로 인정받으며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지금도 30대를 넘긴 장년층에서는 별식으로 먹던 '치킨면'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컵라면은 1972년 3월 7일 발매되어 특히 학생층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즉석 용기면에 비해 기술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부어도 잘 익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가격은 다른 것들보다 조금 비싸 한 개에 50원이었다.
삼양라면의 위세에 눌려 곤욕을 치렀던 롯데라면은 후발 업체로서의 비애를 씹으면서도 신제품 개발을 통해 한발, 한발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롯데라면은 삼양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롯데제과에서 지원받은 껌이나 별 사탕을 넣기도 하고 120개를 사면 고급 탁상시계를 주는 경품 제도까지 실시했으나, 영업 사원들이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결재일이 두렵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도매점에서 결재를 약속하고도 자리를 피하거나 아예 물건을 반품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1968년에 '왈순마' '장모님 곱빼기'를, 1969년에는 '스파이스 라면'을 출시했으나 한번 굳어진 업계의 위치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70년에 국내 최초로 개발한 '소고기라면'이 히트를 치고 현재까지도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새우깡'으로 다소 여유가 생기면서 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렇게 조금씩 입지를 넓혀 나가던 롯데라면은 1975년에 개발한 '농심라면'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인기를 끌게 되면서 후발 업체로서의 서러움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농심라면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구봉서-곽규석 콤비를 광고에 등장시켜 쫄깃한 면발과 구수한 국물 맛을 선전했는데, 소비자들에게 맛이 제법이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롯데라면은 회사 상호까지 아예 농심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업계 선두의 자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은 후발업체인 농심의 추격에 맞서 신제품을 개발하기보다 기존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주력해 나갔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업계의 위치는 농심이 야심차게 발매한 신제품들로 인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1982년 11월에 출시된 '너구리'와 1983년 9월에 발매된 '안성탕면' 그리고 1986년 10월에 개발된 '신라면'은 '히트 삼총사'로 불리면서 '라면은 삼양'에서 '라면은 농심'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너구리는 '오동통한 내 너구리'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굵고 쫄깃한 면발로 씹는 맛을 강화시켰으며 기호에 따라 얼큰한 맛과 순한 맛을 선택할 수 있도록 두 가지 맛의 제품을 동시에 발매해 더욱 인기를 끌었다.
안성탕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탕을 라면에 접합시킨 맛으로 현재까지 단일 제품으로는 가장 많은 양을 판매한 제품이다.
신라면은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 한국인들의 기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단일 제품의 판매량이 경쟁사의 전체 판매량과 맞먹는다고 할만큼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간판 제품이다.
특히 신라면은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어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라면의 종주국이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라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수출 향상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한 상품이다.
농심이 업계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소비자들의 기호를 정확히 읽어 낸 품질 좋은 신제품을 개발한데도 큰 원인이 있으나, 89년에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우지파동으로 인해 삼양라면이 상당기간 발매가 중지된 것도 결정적인 기회로 작용했다.
1994년 1월 과거와 비슷한 주황색 포장지에 담겨져 재 발매된 삼양라면은 우지파동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소비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출시 6개월만에 월 평균 40만 박스 이상을 판매하는 호조를 보여 일단 재 출시에 성공을 거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장년층 이상의 소비자들은 과거의 라면 맛과 차이가 많다는 애교있는(?)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삼양라면 측은 "소비자들의 입맛이 변화되면서 라면 맛도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장은 장년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었고 맛은 신세대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지를 사용하지 못하고 식물성 기름으로 유탕을 했기 때문입니다."
삼양 식품은 이외에도 90년 초에 '쌀라면'을 출시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농심은 진공 Mixer 공법을 이용한 '쌀탕면'과 '순진면'그리고 부드러운 맛으로 입맛을 돋우는 '소세지 짜장면' 등을 출시하여 업계의 선두 자리를 굳히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외에도 청보라면을 인수한 오뚜기와 빙그레 등이 라면을 발매하고 있으나 시장 점유율은 아직 미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세계인의 입맛 통일
가난한 마음과 허기진 배를 달래 주던 라면은 이제 다양한 맛과 간편한 조리 방법으로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 먹는 별식 중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또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우리의 라면을 맛본 외국인들이 너도나도 즐겨 먹고 있기에 현재 세계 70여개국에 수출되고 있을 정도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농심에서는 한해 5,000만 불 이상의 수출을 하고 있으며 중국 상해에 연간 1억 5천만개의 컵라면을 생산할 수 있는 현지 공장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의 라면으로 세계인들의 입맛을 통일하게 된 것이다. 식량 자급화를 위해 외국의 시설과 기술을 지원 받아 어렵게 공장을 설립한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난 후 라면 맛에 더욱 익숙해진 외국인들이 라면의 본맛을 찾아 국내로 여행을 오거나, 라면의 변천사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게 되는 일도 전혀 엉뚱한 상상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료=월간 열혈남아 1997 3월호)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 육상스타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임춘애는 메달을 획득한 후 가난했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라면만 먹고 달렸다"는 말로 대신해 국민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임춘애 뿐만 아니라 어렵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라면으로 채우며 오늘보다 풍요로운 내일을 위해 노력을 거듭했다는 말을 자주하곤 한다.
아나운서 이계진도 그의 책에서 "라면은 예비고사 수석과 고시 합격자를 숱하게 배출시킨 음식이기도 하지만 방송의 질을 높이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며 야근 때마다 즐겨 먹던 라면에 대해 회상했다.
그러나 라면은 이제 먹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눈물을 삼키며 주린 배를 채우던 가슴 아픈 음식이 아니다. 화려한 포장과 색다른 맛으로 청소년들에게도 사랑 받는 것은 물론,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고 있는 효자 상품으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 꿀꿀이죽 대신 라면을
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처음 발매된 때는 1960년대. 당시 보험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삼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이 일본의 한 포장마차에서 끓여 주던 라면을 먹게 되면서부터.
남대문 시장에서 파는 지저분한 꿀꿀이 죽 대신 라면을 대용식으로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전회장은 상공부를 어렵게 설득하여 공장 설비 자금을 마련하고, 일본 묘조(明星)식품에서 시설과 기술을 도입하여 1963년 9월 드디어 '삼양라면'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의 삼양라면은 미곡 중심의 식생활에 익숙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다지 즐겨 먹지 않던 면류였고 맛 또한 너무 싱겁고 느끼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더구나 먹는 음식이 아니라 옷감의 일종인 '라면(羅綿)'으로 오해한 사람들도 많아 판매에 더욱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원 가족들까지 총동원하여 서울역이나 남대문 시장 등에서 무료 시식을 계속하며 끈질기게 판매를 유도한 끝에 결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잡아당기기 시작했고, 1965년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혼분식 장려 정책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제2의 주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라면이 이렇게 많은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싱겁고 느끼한 맛 대신 얼큰한 맛의 스프를 개발하여 국에 익숙한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추었고, 번거롭게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물과 김치만 있으면 언제든지 훌륭하게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간편함 때문이었다.
당시 삼양라면은 소비자들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발매 초기의 누적된 적자를 말끔히 씻고 봉지당 10원이라는 판매가와 1원 미만의 낮은 이윤에도 불구하고 1965년 7월 한 달에만 100만 봉지를 판매하는 등 탄탄대로의 성장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삼양라면은 현재 농심으로 상호를 변경한 '롯데라면'을 비롯해 '해표라면(동방유량)' '닭표라면(신한제분)' '해랑라면(풍국제면)' 등 유사업체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국내 최대의 라면 회사로 입지를 굳힌 농심은 당시 롯데 공업 주식회사에서 '롯데라면'을 발매하며 판매 경쟁에 참여하였으나 선발 업체의 시장 장악력이 워낙 뛰어나 판매율을 신장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같은 어려움 때문에 롯데라면을 제외한 유사 업체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 한 그릇에 모든 영양이 듬뿍?
라면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으로 꼽히는 것은 중국에서 즐겨 먹던 '건면(乾麵)'을 일본인 사업가 안도 시로후쿠라가 밀가루 튀김을 만드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개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을 니신(日淸)식품에서 생산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으나, 이 시기에 판매된 것들은 조미 국수에 양념 국물을 가미한 것이었으며 스프를 첨가한 것은 1961년 묘조(明星)식품에서 개발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라면은 인스턴트 면류의 일종으로서 밀가루 또는 곡식가루를 주원료로 하여 만든 건조 식품이다. 기름에 튀긴 '유탕면', 기름에 튀기지 않고 건조시켜 만든 '건면', 식기로 사용하는 용기에 면을 넣어 별첨된 양념 스프를 첨가한 '즉석면' 등이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것은 대부분 기름에 튀긴 유탕면이며 성분을 살펴보면 소맥분이 83∼85%, 정제 유지가 15∼18%, 정제염 1∼2% 등으로 만들어졌다.
스프의 성분은 쇠고기, 간장, 글루타민산나트륨, 핵산 조미료, 포도당, 향신료, 마늘, 양파, 고추 등이 혼합되어 있으며, 유탕 과정에서 쓰는 기름은 주로 동물성 기름인 우지(牛脂)를 많이 사용했으나 인체에 유해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지금은 식물성 팜유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라면 제조 관계자들이 가장 서운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사용되는 원료들이 천연식품이 아니라는 일반인들의 인식과 장기간 먹을 경우 인체에 대단히 해롭다는 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라면 제조사 측의 한 관계자는 "라면은 몇백 원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되는 단일 음식으로는 가장 영양가가 높으며, 소비자들의 기호 역시 대단히 고급스러워 졌기 때문에 인공 재료를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또한 "어떤 식품이든 한가지만 계속 편식을 하면 탈이 나게 마련 아니냐"면서 "한 달간 계속 라면을 먹으면 위에 구멍이 난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라면은 원료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성분이 탄수화물이고 지방과 기타 성분이 소량으로 함유되어 있어 1봉지(120g)당 550kcal 정도의 고칼로리 식품. 제조 회사들은 천연 원료를 재료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많은 영양가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단일 식품으로서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야채나 고기와 함께 먹어야만 균형 있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
# 꼬불꼬불 라면의 변천사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로 발매된 삼양라면은 투명한 비닐 포장에 닭 그림과 함께 '닭고기국물로 맛을 냈다'는 광고를 내보내 관심을 끌었다.
한동안 '라면은 삼양라면'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70년대 초에 발매한 '삼양칼국수'는 '천연 원료를 사용한 가장 안전한 식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품목 다양화를 꾀한 제품이었다.
요즈음 발매되는 인스턴트 칼국수에 비하면 모양이나 맛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나 100g 한봉지에 30원의 가격으로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70년 '짜장면'을 시판한 삼양은 1972년 3월 7일에는 국내 최초의 용기면인 '컵라면'을 시판해 영업사원을 하려면 삼양으로 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다.
도매상이나 대리점에서 미리 결재 준비를 해 놓고 수금 사원을 기다렸을 정도이며, 영업 사원들의 비위를 건드리면 장사를 그만 두어야 했기 때문에 타 회사 직원들에게 삼양식품의 영업사원은 스트레스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1970년에 발매된 '짜장면'은 당시 외식으로 가장 즐겨 먹던 짜장면을 즉석에서 먹을 수 있도록 개발해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가격은 120g 한 봉지에 25원. 이듬해에 발매된 '치킨면'은 고기를 먹는 일이 흔하지 않았던 소비자들에게 카레 맛까지 가미시킨 색다른 맛으로 인정받으며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지금도 30대를 넘긴 장년층에서는 별식으로 먹던 '치킨면'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컵라면은 1972년 3월 7일 발매되어 특히 학생층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즉석 용기면에 비해 기술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부어도 잘 익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가격은 다른 것들보다 조금 비싸 한 개에 50원이었다.
삼양라면의 위세에 눌려 곤욕을 치렀던 롯데라면은 후발 업체로서의 비애를 씹으면서도 신제품 개발을 통해 한발, 한발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롯데라면은 삼양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롯데제과에서 지원받은 껌이나 별 사탕을 넣기도 하고 120개를 사면 고급 탁상시계를 주는 경품 제도까지 실시했으나, 영업 사원들이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결재일이 두렵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도매점에서 결재를 약속하고도 자리를 피하거나 아예 물건을 반품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1968년에 '왈순마' '장모님 곱빼기'를, 1969년에는 '스파이스 라면'을 출시했으나 한번 굳어진 업계의 위치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70년에 국내 최초로 개발한 '소고기라면'이 히트를 치고 현재까지도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새우깡'으로 다소 여유가 생기면서 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렇게 조금씩 입지를 넓혀 나가던 롯데라면은 1975년에 개발한 '농심라면'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인기를 끌게 되면서 후발 업체로서의 서러움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농심라면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구봉서-곽규석 콤비를 광고에 등장시켜 쫄깃한 면발과 구수한 국물 맛을 선전했는데, 소비자들에게 맛이 제법이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롯데라면은 회사 상호까지 아예 농심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업계 선두의 자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은 후발업체인 농심의 추격에 맞서 신제품을 개발하기보다 기존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주력해 나갔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업계의 위치는 농심이 야심차게 발매한 신제품들로 인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1982년 11월에 출시된 '너구리'와 1983년 9월에 발매된 '안성탕면' 그리고 1986년 10월에 개발된 '신라면'은 '히트 삼총사'로 불리면서 '라면은 삼양'에서 '라면은 농심'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너구리는 '오동통한 내 너구리'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굵고 쫄깃한 면발로 씹는 맛을 강화시켰으며 기호에 따라 얼큰한 맛과 순한 맛을 선택할 수 있도록 두 가지 맛의 제품을 동시에 발매해 더욱 인기를 끌었다.
안성탕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탕을 라면에 접합시킨 맛으로 현재까지 단일 제품으로는 가장 많은 양을 판매한 제품이다.
신라면은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 한국인들의 기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단일 제품의 판매량이 경쟁사의 전체 판매량과 맞먹는다고 할만큼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간판 제품이다.
특히 신라면은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어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라면의 종주국이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라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수출 향상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한 상품이다.
농심이 업계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소비자들의 기호를 정확히 읽어 낸 품질 좋은 신제품을 개발한데도 큰 원인이 있으나, 89년에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우지파동으로 인해 삼양라면이 상당기간 발매가 중지된 것도 결정적인 기회로 작용했다.
1994년 1월 과거와 비슷한 주황색 포장지에 담겨져 재 발매된 삼양라면은 우지파동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소비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출시 6개월만에 월 평균 40만 박스 이상을 판매하는 호조를 보여 일단 재 출시에 성공을 거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장년층 이상의 소비자들은 과거의 라면 맛과 차이가 많다는 애교있는(?)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삼양라면 측은 "소비자들의 입맛이 변화되면서 라면 맛도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장은 장년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었고 맛은 신세대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지를 사용하지 못하고 식물성 기름으로 유탕을 했기 때문입니다."
삼양 식품은 이외에도 90년 초에 '쌀라면'을 출시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농심은 진공 Mixer 공법을 이용한 '쌀탕면'과 '순진면'그리고 부드러운 맛으로 입맛을 돋우는 '소세지 짜장면' 등을 출시하여 업계의 선두 자리를 굳히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외에도 청보라면을 인수한 오뚜기와 빙그레 등이 라면을 발매하고 있으나 시장 점유율은 아직 미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세계인의 입맛 통일
가난한 마음과 허기진 배를 달래 주던 라면은 이제 다양한 맛과 간편한 조리 방법으로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 먹는 별식 중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또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우리의 라면을 맛본 외국인들이 너도나도 즐겨 먹고 있기에 현재 세계 70여개국에 수출되고 있을 정도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농심에서는 한해 5,000만 불 이상의 수출을 하고 있으며 중국 상해에 연간 1억 5천만개의 컵라면을 생산할 수 있는 현지 공장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의 라면으로 세계인들의 입맛을 통일하게 된 것이다. 식량 자급화를 위해 외국의 시설과 기술을 지원 받아 어렵게 공장을 설립한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난 후 라면 맛에 더욱 익숙해진 외국인들이 라면의 본맛을 찾아 국내로 여행을 오거나, 라면의 변천사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게 되는 일도 전혀 엉뚱한 상상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료=월간 열혈남아 1997 3월호)
종합뉴스팀기자enter@gonews.co.kr |
[고뉴스 www.gonews.co.kr 200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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