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守護의 영웅, 울릉군 향군회원 활약상

53년 독도수비대 창설, 일본의 침범을 30여차례나 격퇴

..독도수호의 영웅으로 추앙받아야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韓國領 獨島'가 있다.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일본의 독도 침범을 30여 차례나 격퇴시킨 자랑스런 독도수비대원, 그들은바로 울릉군 재향군인회 홍순칠 회장을 비롯한 33인의 향군회원들이었다.

작금의 일본의독도 영유권 주장을 보면서 당시 향군회원들의 국토방위의식이 없었다면 오늘의 독도는 아마도'일본령 다케시마'가 되었을 것이다.

독도수비대장인 홍순칠(당시 23세, 육군상사전역)씨는 1952년 원산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동년 7월 고향인 울릉도로 귀향하여 8월 20일에 울릉군 재향군인회 창립과 함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1∼3대, 8대, 4차례 6년간 역임)


▲ 왼쪽부터 홍순칠(수비대장), 구국찬(울릉경찰서장), 홍순엽(교육장), 임상욱(울릉군수), 울릉고 교장, 경찰수행원


부상당한 상이군인으로 전역한 홍순칠 회장에게 잠시의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6·25혼란기를 틈타 일본의 순시선, 어선들이 독도침범과 강제점령이 빈발하여 우리 어민들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48년 미군의 독도 폭격훈련으로 어로 활동 중 희생된 우리 어부들을 위해 독도에 건립된 위령비를 일본인들이 53년 6월 3차례나 불법 점령하여 비석을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홍순칠 회장은 독도경비를 위한 수비대 조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재향군인회의 임무 중 하나가 전후 후방지역 향토방위였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군·경은 전방지역에 투입되거나 전후처리 관계로 독도수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할 때이다.

이에 홍 회장은 독도지역의 심한 파도 속에 일본 순시선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젊은 제대군인들이 필요했고 울릉군 내 6·25전투 경험이 있는 예비역을 규합하는 등 약 1년간에 걸쳐 조직편성과 장비 준비에 들어갔다.물론 정부의 지원이라고는 하나없는 상황이었다.

홍 회장은 일본 어선과 순시선의 독도 침범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수비대 창설이 완료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에 홍 회장은 비록 수비대 창설 이전이지만 우선 지원자 10여 명을 대동하고 53년 4월 20일 독도 서도에 입도하여 이때부터 사실상의 독도수비에 임하여 10여 차례 일본어선들과의 전투를 치러 승리하였다.

54년 4월 20일 마침내 인원조직과 장비편성이 완료된 "독도 의용수비대"는 동년 4월 27일 독도 선착장 현지에서 정식 발대식을 갖게 되지만 편성장비는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0.5톤 통통배 1척, 박격포 1문, 경기관총 1정, M1소총 20정, 실탄 2만 4천발이 전부였다.

▲ 독도경비초사 및 표석제막기념사진(1954.5.26)


이들은 2개 전투분대, 보급대, 후방지원대, 수송대 등 33명으로 편성하였으며 2개 전투분대는 1개월씩 교대하며 독도현지에서 근무하였고, 보급대, 후방지원대, 수송대는 울릉군 재향군인회에 사무소를 두고 인원충원, 식량, 급수, 장비 등을 조달 지원하거나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독도수비를 전담한 전투분대는 독도의 악천후 속에서 3∼4일씩을 예사로 굶어가며 독도사수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53년 5월 28일 독도상륙을 시도하는 일본 수산청 소속 선박1척(9명)을 격퇴시키는 첫 전투를 한 이래 56년 12월 25일 독도수비 임무를 우리나라 경찰에 인계하기까지 3년 8개월간 30여회에 이르는 일본 함정과 선박의 독도 침범과 상륙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독도수비대의 전투임무 수행은 완벽했다. 이들은4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차례도 일본의 침탈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특히 54년 11월 21일 일본 보안청 군함 3척과 자위대 항공기를 격퇴시킨 것은 이순신 장군이 남해에서 왜적을 물리친 승리에 버금가는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다.이를 우리는 앞으로 "독도대첩"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당시 NHK 일본방송이 보안청 함정 승조원 중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특별보도(생존자 증언)한 사실만 보아도 그 날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울릉군 재향군인회를 모태로 창설된 '독도의용수비대'의 독도경비 임무는 역사적 관점이나 국제법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25 이후 이들의 실효적 지배가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 독도는 일본 자위대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을 것이다.

▲ 향군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가 관측장비를 제작, 일본의 침범을 감시하고 있다

울릉군 재향군인회의 '독도의용수비대'는 실로 장하고 위대했다. 대한민국 영토수호의 영웅들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6·25전쟁에서 UN군으로 참여한 21개국의 도움을 받고도 나라 반쪽을 잃었는데 독도수비대원 33인은 정부의 무지원과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독도를 지켜내지 않았는가.


현대적 관점에서 독도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과거 우리역사에서 자랑스러웠던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 당 태종 30만 대군과 싸워 이긴 안시성전투, 임진왜란 당시의 한산대첩에 비추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홍순칠 수비대장의 우직한 국토사랑은제갈공명의 지혜와 충무공의 창의적 위계전략처럼 뛰어났다. 나무를 깎아 대포모형(위장포대)을 제작하여 일본의 군함들이 위계에 걸려 감히 상륙작전을 할 수 없도록 했다. 그것은 바로 1954년 11월 21일 현대화 장비로 무장한 일본 군함과 항공기를 격퇴시킨 독도대첩의 승리가 이를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정말 통쾌하고 후련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울릉군 재향군인회의 독도수비대가 창설(실제 독도수비는 창설 1년전부터 실시)된지 금년으로 54주년이 되었다. 이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박세직 회장을 비롯한 회장단과 전국 13개 시도회장등 40여 명은오는 18일 선배회원들의 혼과 전공이 깃든 독도를 방문, 이들의 얼을 "향군 魂"으로 승화시키고 일본의 만행을 규탄키로 나선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일본의 독도침탈을 위한 계략이 조직적이고 노골화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향군의 독도수비대 정신을 이어받아 유사시 향군의 사명을 다시한번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늦었지만 독도수비대의 활약상을 학교교육에 포함시키고 이들의 유물을 정리하여 박물관에 전시하는 등의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이들의 영토수호 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독도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이들의 공적이 간과되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다.지금이라도 이들의 전사를 발굴 정리하고 국가유공자 특별 예우를 하는데 우리 향군은 물론 국가, 국민 모두가 나서야 할 것이다.


이들을 저버린다면 독도는 더욱 외로운 섬이 될 것이며나아가 독도는 한국의 영토 되기를 거부할지도 모른다.오늘따라 독도수비대가 새겨놓은 "韓國領"이라는 영토표시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옴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홍순칠 수비대장(1986.2.7 사망)을 비롯한 유명을 달리한 독도영웅들의영전에 명복을 빌고 생존한 선배 향군회원 여러분의 건투를 빈다.(konas)

* 참고자료:재향군인회 50년사(2003년 1월 20일 발행)

권재찬 (코나스 편집장)

[코나스넷 http://www.konas.net/2008.8.13]

Posted by no1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