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16. 14:02
한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단순히 역경을 딛고 일어서 출세하였다든가 또는 큰 업적을 남겼다는 차원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성공 이야기를 승화시켜 보편적 가치로 전환하여 인류보편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을 때 붙여질 수 있는 최대의 찬사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워싱턴 주 상원의원 신호범 박사(Paul Shin)는 위대한 한국인이란 칭호글 붙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신호범 의원은 4살 때 병으로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으로 아버지가 집을 떠나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야 했다. 외가에서의 숨막히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서울로 올라와 거지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6.25전쟁으로 인해 미군과 인연을 맺게 되고 한국에 주둔한 한 군의관의 양자로 미국에 가게 된다. 이때가 그가 16세 되던 1955년이었다. 그 때까지 한 번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던 그는 어릴 때 가졌던 선생님이 되는 꿈을 양부에게 말하게 되고 그 때부터 검정고시 준비를 하여 1년 반 만에 합격하게 된다. 그리고 미군에 입대하여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미국무성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시민권을 얻은 지 일정한 기간이 지나지 않아 임용이 되지 못한다. 대신 장학금을 얻어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브리검영 대학교 하와이 분교에 교직을 얻어 교수로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학비가 싸고 동양학이 개설되어 있는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근무하게 된다.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의 아버지도 만나고 몇 년에 걸쳐 아버지를 비롯하여 새어머니와 그 동생들을 모두 미국으로 초청하여 미국에서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두 자녀를 입양하여 길렀으며 처남들의 뒷바라지도 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자수성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드물기는 하지만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로 끝났다면 신호범 의원은 위대한 한국인 대열에 포함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신호범 의원은 군복무 시절에 뼈저린 인종차별을 경험한다. 식당에 동료들과 들어갔다가 쫓겨난 것이다. 이 때 신 의원은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하나님, 당신이 계시다면 대답 좀 해주십시오.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서서 가는 곳마다 차별받고 멸시 천대를 받게 하십니까? 하나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면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오늘 밤에 내 생명을 거둬가 주십시오. 이런 세상에 정말 더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벽 여명이 밝아 오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면 된다. 네가 정치지도자가 되어라. 너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라.” 신 의원은 인종차별 경험을 한 차원 더 승화시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십자가를 진 것이다. 마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였듯이 신 의원 역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기회는 1987년에 왔다. 그 해 워싱턴 주지사가 신 의원에게 하원의원 출마를 권유한 것이다. 그는 지역구 2만 9천 가구를 하루 150가구씩 방문하는 노력 끝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위대함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연방하원의원과 워싱턴 주 부지사에 출마하여 고배의 쓴잔을 마시고 난 후이다. 그는 1998년에 다시 발로 뛰는 선거운동의 결과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이 때부터 신호범 의원의 정치인으로서의 위대함이 빛을 보게 된다. 상원에 등원하자 신호범 의원은 ‘Oriental´로 불리는 동양인의 명칭을 ’Asian´으로 변경하는 법안을 제출한다. 이것은 흑인을 멸시하는 ‘니그로’라는 명칭을 ‘아프리칸-아메리칸’ 또는 ‘블랙 아메리칸’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과 같이 동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을 바로잡는 획기적인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2002년 통과된다. 위싱턴 주에서 ‘Oriental´을 ’Asian´으로 바꾸도록 한 법안은 2003년 연방을 비롯하여 미국의 50개 주에서 통과되어 모든 문서에서 ´Oriental´은 삭제되고 ‘Asian´이 사용되게 되었다. 그는 뿐만 아니라 한 일본인이 1902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인종차별로 인해 자격증을 받지 못한 것을 법안을 통과시켜 자격증을 추서케 하였다. 역시 인종차별의 장벽을 허무는 쾌거였다. 또한 그는 워싱턴 주 기념공원에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를 건립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통과되었다. 신 의원은 “내가 정치 지도자가 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두 번째는 나의 은인이며 내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앍 해준 나의 양아버지 레이 폴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고마운 연합군의 덕이라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워싱턴 주에서는 한국전쟁에 2만여 명이 참전하였고 584명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기념비 조각은 신 의원 자신이 구상한 것인데, 얼어붙은 전선의 겨울 최전방 막사에서 조그만 불씨를 살려 나무를 태우며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쪼그리고 둘러 앉은 모습, M1총대를 메고 수심에 잠긴 모습, 고향을 떠나 가족을 그리워하는 모습, 밤에 잠을 못 자고 전투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인데, 이것은 신 의원의 직접적인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또한 신호범 의원은 한국인의 미국이민 10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매년 1월 13일을 ‘한국의 날’로 제정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통과되었다. 금년 1월 워싱턴 주에서는 제2회 “Korean-American Day"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또한 신호범 의원은 워싱턴 주립대학교의 한국어학부를 모금 및 자금지원 법안을 통과시켜 유지시켰으며 한국어 교육법을 통과시켜 한국어를 각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신호범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해외 동포 7백여만 명이 어디에서 살든지 민족 언어와 문화와 뿌리를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문화 속에서 훌륭하게 적응하며 살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면 이중문화에서 겪는 문화적 충돌에서 좌절하지 않는, 적어도 양 문화의 우수한 것을 흠뻑 빨아들여 열등감을 뛰어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미국문화를 일찍이 다문화예술작품(Tapestry)로 표현한 바 있다. 그는 해외에 입양된 한국인들의 진정한 희망이 되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입양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필자가 신호범 의원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도와주고 있던 한 네델란드 입양 학생이 끝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에 대해 크게 마음 아파 하고 있었다. 워싱턴 주 의회 내 그의 사무실에는 그의 양아들이 선물로 그려 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쌀밥 한 그릇을 들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한 어린 거지의 모습이다. 신 의원의 아들이 8세쯤 되었을 때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쌀밥을 먹는 순간이었다고 말한 것을 그 아들이 기억하여 나중에 그가 성장하여 그 그림을 그려 신 의원에게 선물하였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 쌀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 않은가?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욕심일 것이다. 신호범 의원은 자신이 겪은 어려운 처지를 승화시켜 다른 입양아들의 희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제도 개혁을 이루어 냈다. 이 점이 그를 위대한 한국인으로 만들었다. 신호범 의원이 개척한 선례는 많은 해외 한국인들에게 자긍심을 부여하고 한국인들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인들이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도록 북돋는 거름이 될 것이다. 정창인 독립신문 주필 http://blog.chosun.com/cchungc [독립신문 http://independent.co.kr 2009.2.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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