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4.19혁명 여걸(女傑) 전사에게 듣다
이재영 4·19민주화혁명 유공자,
“목숨을 걸고 하니 안 되는 것이 없더라”
“그 날(4월19일)신문사 짚 차 한 대가 취재하기 위해 우리 곁에 와 있고, 거리에는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고 있더라구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멈춰 있던 차 범퍼 위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군중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저를 향해 주십시오. 지금 경무대 앞에서는 무수히 많은 우리 동지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곳에만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발포경찰을 잡으러 경무대로 향해 갑시다. 3·1정신을 되살리면서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향해서 달려갑시다 하고요.”
멈춤 없이 말을 이어가는 목소리에서는 힘이 넘쳐났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구치는지 기자도 의문이 들 정도로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속사포와 같은 답변이 곧 이어졌다.
1960년 4월19일 17세 여고생 나이에 자유당 정부의 독재에 맞서 거리로 뛰쳐나가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며 무명천에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고 나가 독재타도를 외치며 4·19민주혁명 대열에 앞장섰던 앳된 소녀는 5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난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억척 여성에, 아직도 그 당시 민주주의를 외치며 투쟁했던 여걸 전사의 이미지가 짙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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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여, 67). 영세명루시아.
50주년을 맞는 4·19혁명 기념일을 바로 앞두고 기자가 약속된 시간에 경기도 성남시 자택으로 방문하자 마침 거실에 잘 정리되어 있는 화초를 손질하고 있던 이 루시아씨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로 뒤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 능선으로는 파릇한 싹들이 새움을 틔우고 거실에는 꽃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화분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 분위기마저도 봄을 연상하기에는 더없이 화사해 보였다.
이재영씨는 4·19민주혁명 유공자로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그 공로를 인정 받아 건국포장을 수상했다. 이는 정부가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민주혁명에 헌신하고도 유공자 선정이 안된 4·19혁명 참가자를 발굴 해 그중 272명을 포상하게 됐는데 이재영씨도 이번에 포상을 받았다.
천안함 사건을 언급하며 말문을 열자 이내 답변이 이어졌다. "왜 그렇게 우왕좌왕하는지 모르겠다. 군도 그렇고 사회도, 언론도 다 마찬가지다. 왜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분위기를 몰아가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교훈으로 받아 들였으면 한다"며 "모든 일에는 어떤 희생이 따라야 또한 결실도 맺게 된다는 것을 느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군도 전체적으로 재정비되고, 우리사회도 한 단계 더 성숙하고 각성하는 기회로 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의 안보는 어떤 경우에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라며 "아들만 넷이다. 몸이 건강한 편도 아니었지만 다 군대에 갔고, 또 어쩌다 보니 다들 최전방이나 특수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나도 안보에 대해서는 할말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개인이든 국가든 유비무환의 자세는 언제나 중요한 가치고 교훈인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차 한 잔이 다 식어가면서 50년 전 당시로 다시 대화 분위기가 익어 가자 조금 전 화분 앞에서의 그 모습과는 대조적인 또 다른 열정과 뜨거운 기운이 말을 통해서 방안에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한참을 듣다 잠시 끼어 들며 질문을 하자, "말 하나마나지. 여기저기서 '옳소! 좋다. 우리도 경무대로 갑시다'하며 자리에서 벌떡 벌떡 일어나는데, 일어나기가 바쁘게 서로가 어떤 말이 없으면서도 서로 서로 스크럼을 짜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와' '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갔지요".
- 그 뒤로는요?
"구호를 외치고 노래도 하면서 앞으로 나가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총탄이 쏟아졌어요.(비장한 결의의 눈빛이 담기면서)당황하고 겁에 질려 대열이 순식간에 흐트러지는데, 몇 사람이 쓰러지자 사방에서 '학생들에게 총을 쏘지 마라'하는 절규 소리와 함께 골목 군데군데서는 피를 흘리는 사람의 상처를 짜매주고 부축해서 피신하는 모습이 보이고 했었지."
- 그런데 그 때가 여고생 시절인데?
"여고생이라는 어떤 별도의 느낌이 없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조국이 지금 나를 부르고 있구나'하는 그런 생각만이 들었어요. 어쩌면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렇게 하게 만들었지 않나 합니다.
제가 여자로 태어났지만 조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정의를 위해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은 모두가 아버지 영향이었습니다. 유독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정직과 정의, 그리고 국가관에 대해 많을 말씀을 해주셨어요. 앞에 앉혀 놓고 신문을 읽게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에 토론하고 하다보니 다른 친구들보다 더 빨리 어른 세계에 들어가는 흐름을 읽지 않았나 생각도 돼요.
특히 아버지는 "정의를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수없이 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무척 양심적인 분이셨어요. 건설업을 하셨고, 당시 사업을 꽤 크게 하셨는데... 나중 모든 힘을 기울여 대건흥업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5월16일에 첫 삽을 뜨도록 되어 있었는데 바로 당일인 그 날 5·16혁명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삽 한번 뜨지 못하고 말았네요. 결국 그 이후에 아버지는 일어서지 못하고 생활하시다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마셨습니다.
저한테는 너무 자상하셔서 제가 웅변대회에 나가고 하면 시발택시를 3, 4대에 친구 분들을 모시고 오셔서 응원을 해주시고는 했지요. 아버지는 또 청년당원으로 중요한 일을 맞아 장면 박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이기도 했어요.
또 제가 그 날 데모 대열에 나서게 된 것도 어쩌면 자유당 정부의 치밀한 부정 선거로 시민들에게 공갈과 자유당을 찍을 것을 강요하고 말을 안 들으면 구타도 한다는 말과 함께 3월15일 선거 후 "오늘은 대한민국이 죽는 날"이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마구 들끓고 아버지를 지켜야 겠다는 마음 등이 정의감으로 승화되었는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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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당일 어떻게 했는지?
"말을 하자면 참 복잡하죠. 당시 우리 집은 서울대 근처 명륜동인데, 어머니가 밖에 나갔다 오시더니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하다 경찰들과 부딪치면서 옥신각신 하더라는 말을 해 바로 옷을 챙겨 입고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나갔지요.
종로4가를 거쳐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을 지나 을지로3가까지 갔고요. 그 때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때였는지 점포들도 많이 문을 닫았지만 평상시보다 사람들은 거리에 더 많았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내무부 정문 앞으로 가서 대학생, 시민들과 섞여 연좌데모를 벌였죠.
제가 고등학생이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어요. 제 기질이 그렇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 앞으로 나섰지요. 그러다 경찰 제지에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 구호와 박수를 쳐가며 이번에는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쪽으로 향했는데, 거기에는 서울대생들이 농성을 하고 있더라고. 하지만 여기서도 경찰의 제지를 뚫을 수가 없었어요.
다시 중앙청 앞에서 경무대 쪽으로 가다보니 많은 대학생들이 몰려 있고 해서 주저하지 않고 그들과 합세해 소리높이 구호를 외치고 했어요. 경찰의 최루탄과 연막탄이 우리 주변으로 무차별 쏟아지고 했지만 우리는 스크럼을 풀지 않고 서로 붙어가며 경무대로 향했습니다. 눈을 뜰 수가 없는 그야말로 절규에 최후 발악이라고 할까....
그러다 어느 순간 총소리가 들리더니 총알이 우리 옆에까지 날아오기 시작하고, 누군가 "엎드려"소리에 엎드리고 골목으로 뛰기도 했는데, 경찰은 인정사정 없이 우리를 향해 계속적으로 총을 쏴 댔습니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그 자리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됐어요."
- 그리고요?
"마음은 더 굳어지고 의무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육상선수처럼 뛰어서 해무청 앞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중앙대생들과 휘문고 학생들로 길이 꽉 메워져 있고 마침 한 쪽에 신문사 짚차가 한 대 와 있어서 차 위로 올라가 소리를 질렀지요.
여러분, 저를 향해 주십시오. 지금 경무대 앞에서는 무수히 많은 우리 동지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곳에만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발포경찰을 잡으러 경무대로 향해 갑시다. 3·1정신을 되살리면서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향해서 달려갑시다 하고요."
그래서 경무대로 전진해 가는데 여기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이 퍼붓듯이 쏟아지더라고. 거기서도 몇 사람이 쓰러지고 했는데, 시민정신은 어려울 때 더 빛나는 것 같아요. 총에 맞아 부상당한 사람들을 업고 뛰는 사람, 부축해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사람, 손수건을 상처를 매주는 사람 등 다친 사람을 돕는 손길이 바쁘게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 데모소식을 듣고 부모님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을 텐데.
"어찌 걱정을 하지 않았겠어요. 제 기질을 다 알고 계신 분들인데. 아침에 나간 딸이 밤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으니까 필시 총에 맞은 것이 아닌가 하고 온 식구가 사방으로 흩어져 찾으러 다녔데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앞장서서 데모를 하다 총에 맞아 영안실에 있지 않나 해서 서울대 병원 영안실도 가셔서 안치되어 있는 시신을 일일이 들쳐보고, 혜화동에 있는 수도여전 병원도 들러 시신을 확인하고 그랬대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그만큼 절박한 순간이기도 했겠죠."
- 마음이 무척 착잡 하셨을 텐데?
"같이 데모를 하던 동지들이 총탄에 쓰러졌는데 나만 살아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에 미안함과 분한 생각에 또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총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것만 같고. 기도를 올렸지요. 천주교 신자인데 아침에 나갈 때 바지에 묵주를 넣고 나갔거든요.
그리고 그 날 이후 저는 매일 병원을 다니면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찾아 위문을 했습니다. 저는 살아났기에 용돈을 털어 꽃 몇 송이라도 돌려야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해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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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다녔다고 하던데?
"전 날 저녁 밤2시까지 해서 만들었어요. 가슴에 넣고 다녔지요. 그리고 광화문 방향으로 움직이는 짚차에 한 여학생의 도움을 받으며 짚차 지붕위로 올라갔습니다. 누군가 남자들이 다리를 잡아 주데요. 거기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흔들며 목이 터지도록 외쳤습니다. '부정선거 다시 하고, 우리 주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하고요.
이재영씨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인생에 세 번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느껴지는 인상이지만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세 번 중 첫 번째가 4·19민주혁명에 목숨을 건 것이고, 두 번째는 4형제 아들의 교육, 그리고 세 번째는 오웅진 신부와 꽃동네에 얽힌 누명을 벗기는데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그 결과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운이 좋아서 그런 것 아니냐?"고 물으면 "목숨을 걸고 했다"고. 또 목숨을 걸고 하니 안 되는 것이 없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이 당시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가계가 풍비박산이 돼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하면서 당시 사정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고, 그래서 이후에도 남다른 열정으로 책을 가까이 하면서 대학의 여러 과정에서 최고위 과정을 공부하고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어 배움에 있어는 배고프지 않도록 하고 있다며 호방하게 웃어 넘겼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이들의 국가관에 대해서도 꼬집음을 잊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는 있지만 그 때 당시의 젊은이들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나라생각보다는 자신의 이익 우선, 메이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4·19만 돌아오면 바로 엊그제 일처럼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떤 두려움도 없이 '죽어도 좋다'는 생각과 함께 같이 소리 높여 외쳤던 동지들의 얼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스크린처럼 돌아간다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은 것을 축하하고 "왜 그동안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오직 나라를 위해 한 것이지 나를 위해 한 것이나 유공자가 되기 위해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신청을 하라고 해도 그냥 침묵했다"며, 그러나 "세월이 흘러 50주년이 되면서 주변에서 자꾸 얘기를 하고 보훈처에서도 말이 와 하게 됐다"며 수줍게 웃으며 배경을 알려주었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4.19민주혁명참여자, 전원 포상 추진하라" |
50년 전 4.19주역, "민주혁명 주역들 분노한다" |
4.19와 이승만 제자리 찾기 |
[코나스 www.konas.net 20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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