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증오’가 ‘국보 테러’로

[중앙일보 천인성.임주리.박종근] 호송차에서 내린 범인은 평범한 칠순 노인이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곧 고개를 떨어뜨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입을 다물었다. 다만 가늘고 떨리는 음성으로 “국민들께 죄송하고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가 불타고 있었다. 그 증오가 610년을 버텨 온 대한민국의 문화적 자긍심인 숭례문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12일 서울지방경찰청은 “숭례문 방화사건의 피의자 채종기(70)씨에게서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며 “13일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전날인 11일 강화도 전 부인의 집에서 채씨를 붙잡았다. 범행에 사용한 시너통과 가죽장갑도 확보했다.

채씨는 경찰에서 10일 오후 8시45분 숭례문 2층 누각에 올라가 시너를 뿌리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인 사실을 털어놨다고 한다. 그는 2006년 4월 창경궁 문정전을 방화한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아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다.

범행 동기는 어처구니없었다. “억울함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경찰이 확보한 자필 편지엔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토지 보상액을 높이지 않은 건설사, 자신의 민원·진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고양시와 청와대, 불리한 판결만을 내리는 법원 등 모두가 증오의 대상이었다.

경찰 신문 도중 그는 “국가에 대한 보복으로 열차 전복도 생각했으나 포기했다”고 말해 수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범행에 앞서 두 차례나 숭례문을 사전 답사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범죄심리학자들은 채씨가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겪고 있다고 분석한다. “개인의 잘못을 모두 국가와 사회 탓으로 돌리는 극단적인 자기 합리화”(표창원 경찰대 교수·범죄심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분노는 종종 유·무형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수정(범죄심리) 경기대 교수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채씨가 진정 원한 것은 본인의 정당함을 널리 알릴 기회와 통로”라며 “그 기회와 통로가 반국갇사회적인 숭례문 방화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채씨와 같은 이들의 증오심은 종종 대형 참사의 불씨가 됐다. 2003년 2월 2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던 대구 지하철 사건이 예다. 지병과 가난으로 사회에 대한 증오를 키웠던 방화범 김대한(2004년 사망)씨는 “혼자 죽을 수 없다”며 승객이 가득한 지하철에 불을 질렀다.

범인은 잡혔다. 그러나 여느 사건과 달리 국민들 마음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고 있다. 눈앞에서 다섯 시간 만에 사라진 ‘국보 1호’에 대한 안타까움과 제2, 3의 채씨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천인성·임주리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 비도덕적이거나 반사회적 행동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곤 한다.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고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법적 처벌이 면제되는 정신질환은 아니다.

출처 중앙일보

[인터넷타임스 http://internettimes.co.kr/2008.2.13]

Posted by no1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