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4.19혁명 여걸(女傑) 전사에게 듣다

이재영 4·19민주화혁명 유공자,
“목숨을 걸고 하니 안 되는 것이 없더라”



“그 날(4월19일)신문사 짚 차 한 대가 취재하기 위해 우리 곁에 와 있고, 거리에는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고 있더라구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멈춰 있던 차 범퍼 위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군중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저를 향해 주십시오. 지금 경무대 앞에서는 무수히 많은 우리 동지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곳에만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발포경찰을 잡으러 경무대로 향해 갑시다. 3·1정신을 되살리면서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향해서 달려갑시다 하고요.”

멈춤 없이 말을 이어가는 목소리에서는 힘이 넘쳐났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구치는지 기자도 의문이 들 정도로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속사포와 같은 답변이 곧 이어졌다.

1960년 4월19일 17세 여고생 나이에 자유당 정부의 독재에 맞서 거리로 뛰쳐나가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며 무명천에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고 나가 독재타도를 외치며 4·19민주혁명 대열에 앞장섰던 앳된 소녀는 5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난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억척 여성에, 아직도 그 당시 민주주의를 외치며 투쟁했던 여걸 전사의 이미지가 짙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 인터뷰 도중 당시 사진을 들여다 보다 활짝 웃음을 짓고 있는 이재영 여사. ⓒkonas.net


이재영(여, 67). 영세명루시아.

50주년을 맞는 4·19혁명 기념일을 바로 앞두고 기자가 약속된 시간에 경기도 성남시 자택으로 방문하자 마침 거실에 잘 정리되어 있는 화초를 손질하고 있던 이 루시아씨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로 뒤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 능선으로는 파릇한 싹들이 새움을 틔우고 거실에는 꽃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화분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 분위기마저도 봄을 연상하기에는 더없이 화사해 보였다.

이재영씨는 4·19민주혁명 유공자로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그 공로를 인정 받아 건국포장을 수상했다. 이는 정부가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민주혁명에 헌신하고도 유공자 선정이 안된 4·19혁명 참가자를 발굴 해 그중 272명을 포상하게 됐는데 이재영씨도 이번에 포상을 받았다.

천안함 사건을 언급하며 말문을 열자 이내 답변이 이어졌다. "왜 그렇게 우왕좌왕하는지 모르겠다. 군도 그렇고 사회도, 언론도 다 마찬가지다. 왜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분위기를 몰아가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교훈으로 받아 들였으면 한다"며 "모든 일에는 어떤 희생이 따라야 또한 결실도 맺게 된다는 것을 느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군도 전체적으로 재정비되고, 우리사회도 한 단계 더 성숙하고 각성하는 기회로 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의 안보는 어떤 경우에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라며 "아들만 넷이다. 몸이 건강한 편도 아니었지만 다 군대에 갔고, 또 어쩌다 보니 다들 최전방이나 특수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나도 안보에 대해서는 할말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개인이든 국가든 유비무환의 자세는 언제나 중요한 가치고 교훈인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차 한 잔이 다 식어가면서 50년 전 당시로 다시 대화 분위기가 익어 가자 조금 전 화분 앞에서의 그 모습과는 대조적인 또 다른 열정과 뜨거운 기운이 말을 통해서 방안에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한참을 듣다 잠시 끼어 들며 질문을 하자, "말 하나마나지. 여기저기서 '옳소! 좋다. 우리도 경무대로 갑시다'하며 자리에서 벌떡 벌떡 일어나는데, 일어나기가 바쁘게 서로가 어떤 말이 없으면서도 서로 서로 스크럼을 짜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와' '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갔지요".

- 그 뒤로는요?

"구호를 외치고 노래도 하면서 앞으로 나가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총탄이 쏟아졌어요.(비장한 결의의 눈빛이 담기면서)당황하고 겁에 질려 대열이 순식간에 흐트러지는데, 몇 사람이 쓰러지자 사방에서 '학생들에게 총을 쏘지 마라'하는 절규 소리와 함께 골목 군데군데서는 피를 흘리는 사람의 상처를 짜매주고 부축해서 피신하는 모습이 보이고 했었지."

- 그런데 그 때가 여고생 시절인데?

"여고생이라는 어떤 별도의 느낌이 없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조국이 지금 나를 부르고 있구나'하는 그런 생각만이 들었어요. 어쩌면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렇게 하게 만들었지 않나 합니다.

제가 여자로 태어났지만 조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정의를 위해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은 모두가 아버지 영향이었습니다. 유독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정직과 정의, 그리고 국가관에 대해 많을 말씀을 해주셨어요. 앞에 앉혀 놓고 신문을 읽게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에 토론하고 하다보니 다른 친구들보다 더 빨리 어른 세계에 들어가는 흐름을 읽지 않았나 생각도 돼요.

특히 아버지는 "정의를 위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수없이 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무척 양심적인 분이셨어요. 건설업을 하셨고, 당시 사업을 꽤 크게 하셨는데... 나중 모든 힘을 기울여 대건흥업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5월16일에 첫 삽을 뜨도록 되어 있었는데 바로 당일인 그 날 5·16혁명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삽 한번 뜨지 못하고 말았네요. 결국 그 이후에 아버지는 일어서지 못하고 생활하시다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마셨습니다.

저한테는 너무 자상하셔서 제가 웅변대회에 나가고 하면 시발택시를 3, 4대에 친구 분들을 모시고 오셔서 응원을 해주시고는 했지요. 아버지는 또 청년당원으로 중요한 일을 맞아 장면 박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이기도 했어요.

또 제가 그 날 데모 대열에 나서게 된 것도 어쩌면 자유당 정부의 치밀한 부정 선거로 시민들에게 공갈과 자유당을 찍을 것을 강요하고 말을 안 들으면 구타도 한다는 말과 함께 3월15일 선거 후 "오늘은 대한민국이 죽는 날"이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마구 들끓고 아버지를 지켜야 겠다는 마음 등이 정의감으로 승화되었는가 해요."

▲ 거실 벽면에 걸린 당시 사진을 가리키면서 상황을 설명해 주는 이 여사. 가리키고 있는 등을 돌리고 데모학생들 앞에서 구호를 선창하고 있는 교복 입은 여학생이 자신이라고 알려주었다.ⓒkonas.net


- 19일 당일 어떻게 했는지?

"말을 하자면 참 복잡하죠. 당시 우리 집은 서울대 근처 명륜동인데, 어머니가 밖에 나갔다 오시더니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하다 경찰들과 부딪치면서 옥신각신 하더라는 말을 해 바로 옷을 챙겨 입고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나갔지요.

종로4가를 거쳐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을 지나 을지로3가까지 갔고요. 그 때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때였는지 점포들도 많이 문을 닫았지만 평상시보다 사람들은 거리에 더 많았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내무부 정문 앞으로 가서 대학생, 시민들과 섞여 연좌데모를 벌였죠.

제가 고등학생이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어요. 제 기질이 그렇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 앞으로 나섰지요. 그러다 경찰 제지에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 구호와 박수를 쳐가며 이번에는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쪽으로 향했는데, 거기에는 서울대생들이 농성을 하고 있더라고. 하지만 여기서도 경찰의 제지를 뚫을 수가 없었어요.

다시 중앙청 앞에서 경무대 쪽으로 가다보니 많은 대학생들이 몰려 있고 해서 주저하지 않고 그들과 합세해 소리높이 구호를 외치고 했어요. 경찰의 최루탄과 연막탄이 우리 주변으로 무차별 쏟아지고 했지만 우리는 스크럼을 풀지 않고 서로 붙어가며 경무대로 향했습니다. 눈을 뜰 수가 없는 그야말로 절규에 최후 발악이라고 할까....

그러다 어느 순간 총소리가 들리더니 총알이 우리 옆에까지 날아오기 시작하고, 누군가 "엎드려"소리에 엎드리고 골목으로 뛰기도 했는데, 경찰은 인정사정 없이 우리를 향해 계속적으로 총을 쏴 댔습니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그 자리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됐어요."

- 그리고요?

"마음은 더 굳어지고 의무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육상선수처럼 뛰어서 해무청 앞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중앙대생들과 휘문고 학생들로 길이 꽉 메워져 있고 마침 한 쪽에 신문사 짚차가 한 대 와 있어서 차 위로 올라가 소리를 질렀지요.

여러분, 저를 향해 주십시오. 지금 경무대 앞에서는 무수히 많은 우리 동지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곳에만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발포경찰을 잡으러 경무대로 향해 갑시다. 3·1정신을 되살리면서 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향해서 달려갑시다 하고요."

그래서 경무대로 전진해 가는데 여기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이 퍼붓듯이 쏟아지더라고. 거기서도 몇 사람이 쓰러지고 했는데, 시민정신은 어려울 때 더 빛나는 것 같아요. 총에 맞아 부상당한 사람들을 업고 뛰는 사람, 부축해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사람, 손수건을 상처를 매주는 사람 등 다친 사람을 돕는 손길이 바쁘게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 데모소식을 듣고 부모님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을 텐데.

"어찌 걱정을 하지 않았겠어요. 제 기질을 다 알고 계신 분들인데. 아침에 나간 딸이 밤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으니까 필시 총에 맞은 것이 아닌가 하고 온 식구가 사방으로 흩어져 찾으러 다녔데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앞장서서 데모를 하다 총에 맞아 영안실에 있지 않나 해서 서울대 병원 영안실도 가셔서 안치되어 있는 시신을 일일이 들쳐보고, 혜화동에 있는 수도여전 병원도 들러 시신을 확인하고 그랬대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그만큼 절박한 순간이기도 했겠죠."

- 마음이 무척 착잡 하셨을 텐데?

"같이 데모를 하던 동지들이 총탄에 쓰러졌는데 나만 살아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에 미안함과 분한 생각에 또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총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것만 같고. 기도를 올렸지요. 천주교 신자인데 아침에 나갈 때 바지에 묵주를 넣고 나갔거든요.

그리고 그 날 이후 저는 매일 병원을 다니면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찾아 위문을 했습니다. 저는 살아났기에 용돈을 털어 꽃 몇 송이라도 돌려야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해서지요."

▲ 짚차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는 4.19민주혁명 소녀, 이 여사. ⓒkonas.net


-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다녔다고 하던데?

"전 날 저녁 밤2시까지 해서 만들었어요. 가슴에 넣고 다녔지요. 그리고 광화문 방향으로 움직이는 짚차에 한 여학생의 도움을 받으며 짚차 지붕위로 올라갔습니다. 누군가 남자들이 다리를 잡아 주데요. 거기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흔들며 목이 터지도록 외쳤습니다. '부정선거 다시 하고, 우리 주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하고요.

이재영씨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인생에 세 번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느껴지는 인상이지만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세 번 중 첫 번째가 4·19민주혁명에 목숨을 건 것이고, 두 번째는 4형제 아들의 교육, 그리고 세 번째는 오웅진 신부와 꽃동네에 얽힌 누명을 벗기는데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그 결과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운이 좋아서 그런 것 아니냐?"고 물으면 "목숨을 걸고 했다"고. 또 목숨을 걸고 하니 안 되는 것이 없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이 당시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가계가 풍비박산이 돼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고 하면서 당시 사정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고, 그래서 이후에도 남다른 열정으로 책을 가까이 하면서 대학의 여러 과정에서 최고위 과정을 공부하고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어 배움에 있어는 배고프지 않도록 하고 있다며 호방하게 웃어 넘겼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이들의 국가관에 대해서도 꼬집음을 잊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는 있지만 그 때 당시의 젊은이들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나라생각보다는 자신의 이익 우선, 메이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4·19만 돌아오면 바로 엊그제 일처럼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떤 두려움도 없이 '죽어도 좋다'는 생각과 함께 같이 소리 높여 외쳤던 동지들의 얼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스크린처럼 돌아간다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은 것을 축하하고 "왜 그동안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오직 나라를 위해 한 것이지 나를 위해 한 것이나 유공자가 되기 위해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신청을 하라고 해도 그냥 침묵했다"며, 그러나 "세월이 흘러 50주년이 되면서 주변에서 자꾸 얘기를 하고 보훈처에서도 말이 와 하게 됐다"며 수줍게 웃으며 배경을 알려주었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4.19민주혁명참여자, 전원 포상 추진하라"
50년 전 4.19주역, "민주혁명 주역들 분노한다"
4.19와 이승만 제자리 찾기




[코나스 www.konas.net 2010.4.21]


Posted by no1tv


새해 전화인터뷰/


백령도에 나가 있는 對北풍선 단장 李民馥씨


올해 풍선 1500개, 전단 9006만 장 北送(북송).
"풍선은 김정일을 무너뜨리는 가장 싼 방법"



2003년부터 북한으로 풍선을 보내고 있는 기독북한인연합·對北풍선단 단장 李民馥(이민복)씨는 현재 백령도에 있다. 12월 하순에 백령도에 들어간 그는 25일, 28일, 29일 3일간 개당 7kg짜리 풍선 58개를 北으로 날렸다. 풍선 하나마다 전단 6만 장이 들어있으니 며칠 사이에 42만 장의 전단을 北에 들여보낸 셈이다. 2009년 한 해 동안 그가 북으로 보낸 풍선은 1501개, 전단 숫자는 9006만 장이다. 12월31일 오후 李단장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오늘 백령도는 매우 춥습니다. 낮에도 영하 7도입니다. 눈발도 날립니다. 풍랑 때문에 여객선은 끊어졌고 저녁에 떠나는 화물선이라도 타고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李단장은 올 한 해 백령도만 열 번 이상 갔다고 한다. 왜 백령도를 자주 가느냐는 질문에 그는 “평양까지 4시간이면 풍선이 닿고 멀리로는 함경남도까지도 보낼 수 있는 좋은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풍선이 북한 주민들을 깨우치고 궁극적으로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얼마 전 北을 다녀온 在美교포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지방의 당 간부들이 말하길 ‘우리가 배고프고 가난해도 남조선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삐라가 가장 무섭습니다’ 하더랍니다. 또 최근 탈북한 黨 간부들을 만나보면 北에서는 어디나 삐라 문제로 논의가 많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모여앉으면 삐라 얘기만 한답니다. 그 안에 살아있는 뉴스가 들어있으니까요.”

李단장은 전단 내용은 북한 주민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고 말한다. 남한 사람들이 보면 문구가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최근 보내고 있는 전단 내용중 일부를 소개한다.

<분계선인민군과 사민이 직접보는 남녘땅은?!/우거진 산야는 전기로 화목 대신/전력사정은 불빛 넘치는 밤을 보시면 확인/끝없는 차 행렬은 매집에 차 소유/장인이 남로당간부였던 로무현, 청소부였던 리명박이 대통령 될 만큼 성분차별없음/장기수 북송할 만큼 자신감 있는 민주정치/한달로임2300딸라, 이것은 자전거20대, 오토바이3대, 색테레비10대, 흰쌀1250Kg, 강냉이6250Kg 각각 살 수 있고 석 달분이면 자가용 차 삼/

그럼에도 남조선거지?!/그런데 그 거지들은 금강산, 개성 관광하고, 그 거지가 만든 개성공업단지에 4만명 일하는 공화국은?!/남조선은 1970년대에 자전거, 오토바이, 뻐스화, 라지오, 흑백테레비화, 먹고입는 문제 완전해결/1980년대에 매집 색텔레비죤, 랭동기, 세탁기, 전화기보유, 해외려행자유화/1990년대에 온수난방화, 가스, 전기로 밥 짓는 주택 완전해결, 매집 컴퓨터, 승용차소유, 핸드폰은 4500만대로 매 국민소유/조선업1위, 철강5위, 자동차년350만대 세계5위(북은 년1만대),인터넷보급세계1위,도로포장100%,시속400Km고속철도4번째국가,대학진학률세계1위(83.1%,)해외류학생수세계1위(20만명),올림픽4위(88년), 축구4위(02년), 세계대통령 같은 유엔사무총장에 남조선외교부장반기문이 될 만큼 세계10대강국>

전단에는 남한 주민들의 생활상, 북한 주민들의 열악한 삶, 김일성 一家의 북한주민 수탈史, 6·25 남침전쟁의 실상, 세상 돌아가는 내용 등을 북한 주민들이 쉽게 알도록 정리해 놓았다.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이건 청천벽력 같은 얘기입니다. 전에는 당에서 주민들에게 삐라를 보면 주워와 신고하라고 했는데 최근엔 바치지 말고 있는 장소만 얘기하라고 한답니다. 갖고 오면서 읽으면 큰일날 얘기들이 들어있으니 그러는 겁니다.”

전단 내용 하나하나를 손수 작성하는 그는 내용도 시의에 맞는 걸로 계속 바꿔나간다. 2010년에는 북한의 최근 화폐개혁의 문제점을 담을 계획이라고 했다.

“北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겁니다. 수령과 정부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북한 화폐처럼 바닥에 떨어진 게 바로 김정일 정권이라는 걸 주민들에게 알릴 생각입니다. 전단 몇 개로 어떻게 소식을 퍼뜨리느냐고 의아해 하는 분들도 잇습니다. 여기는 정보홍수니까 별 것 아니지만 북한은 오래 폐쇄돼 있다 보니 너무 외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전단 한 장이 입으로 천리를 가게 합니다. 종이쪽지 하나가 수천, 수만의 입이 되어 절로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李단장은 내년엔 풍선 날리는 사업을 더 확대할 생각이다.

“백령도와 강화도, 철원 세 곳에 풍선 날리는 基地(기지)를 만들 계획입니다. 200~300평 정도의 땅을 사든지 임대한 뒤 그곳에 풍선과 전단을 쌓아두는 창고를 만들어 물건을 갖다 놓고 바람이 맞으면 언제라도 띄워보낼 생각입니다. 그간 일기예보에 맞춰 화물을 들고 오가다 보면 바람이 바뀌어 허탕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한 과학원의 농업관련 연구원 출신인 그는 러시아로 탈출했다가 1995년에 입국했다. 6년간 풍선을 만들고 北에 보내다 보니 그는 요사이 정부보다도 앞선 기술을 가진 풍선 전문가가 되었다. 전단 6만 장을 매단 풍선 하나를 12만원에 만들어 보낸다. 백령도에 가서 보내면 배삯 때문에 개당 24만원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교회들이 李씨의 풍선보내기를 응원해 왔다. 李씨는 후원해준 사람이나 단체의 이름을 풍선에 적어 보내고, 꼭 동영상을 찍어 후원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는 가장 싼 방법으로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풍선 보내기라고 말한다.

“게다가 사람이 다치지 않는 방법입니다. 사람이 北에 들어가 라디오나 성경책을 전하는 것은 위험이 따릅니다. 전단 한 장을 들고 가 건네주려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보내는 조직과 받는 북한 사람들이 모두 다칠 수 있습니다. 풍선은 뒷말이 없습니다. 어디서 난 거냐고 물으면 풍선으로 날아온 거라면 더 말을 못하는 겁니다.”

후원계좌: 우리은행 225-060687-12101(예금주: 이민복 북한선교)


아래 자료는 이민복씨가 2009년 한 해 동안 휴전선 일대에서 北으로 보낸 풍선과 후원해준 사람들을 공개한 자료이다.


<2009년 풍선전단 실적(1월-12월)>

1월17일 철원 4개(대형풍선)
1/27 화천 6개
1/28 강화 15개 그중1개 실패*아들 이영준 참가
1월 계 25개*그 중1개 실패

2월4일 김화 30개* 김길자 외 1명, 김성중, 최효원 참가
2/13 철원 13개 * 요셉, 이인수 참가
2/14 김화 13개 * 이인수 참가
2.21 강화도 35개
2/22 철원 12개
2/24 강화도 10개
2월 계 61개

3/5 철원 30개
3/8 소청도 40개*최효원 참가
3/15철원 33개
3/21철원 36개
3월 계 139개

4월18-21 백령도 42개

5월2일 철원 5개
5/15-18 백령도 41개*토론토000,최효원 참관
5월 계 46개

6월1-5일 대청도 55개
6.13-23 백령도 58개
6/30 강화도 5개
6월 118개

7/14 철원오덕교회8개
7/24 철원백마고지 22개 *박미자,요셉 참가
7월계;30개

8/5 백령도 4개
8/6 백령도 25개
8/7 백령도 29개
8/19 김화 7개
8/20 백마 14개 *이귀범 참가
8/25 강화도 1개
8/26-27 김화 35개
8/30 백령도 10개
8월 합계125개

9/21 김화 마현리 3개
9/28 철원동막 4개
9월 합계7개

10/3추석 백령도 47개*백○○ 참가
10/5 백마 10개*그 중 2개 실패=8개
10/7 연천 12개
10/12 철원양지리4개*토론토 길창세 참관
10/13 김화생창리6개
10/16-17 백령도 58개* 그 중 1개 실패=57개*토론토 길○○, 이귀범선교사 참관
10/22 백마 12개
10/25 철원노동당사 10개* 철원나목사외 여 조카 참관
10/28 강화도 10개*미국유타주 김○○과 언니참관
10/30-31 백령도 58개

10월 합계224개

11/6 강화도 10개
11/7 서울역* 북한인권국제기도 1개
11/8 강화도 창후리 18개
11/9 임진각 1개*북한 인권국제기도
11/10 강화도 29개
11/12 임진각, 연천 13개*북구원 김창범 외1명 참관
11/20 강화 송해 1개 *기독사회잭임 6명 참관
11/22 철원 양지리 12개
11/24 강화 창후리 13개*가스창의 가스미달사고로 6개 실패
11/24 강화 철산리 15개*최효원 대령 참여
11/25 강화 송해 12개
11월 합계;115개*6개 실패 =109개

총계1365개 대형풍선=8190만장
*대형풍선1개당 6만장(규격전단기준)

12/2 강화송해 3개 *동천교회 담임목사, 한재화장로 외 1 참관
12/2 철원감리교 10개
12/4 강화 송산, 창후 11개 *최효원 고문 참가
12/9 백령도 39*3개 실패
12/10 백령도 19개 *1개 실패
12/21 철원 백마고지 2개
12/22 김화 양지리 11개
12/25 백령도 7개
12/28 백령도 26개
12/29 백령도 25개 *백령 다담유통대표 양태철 참관

*12월 합계 140개*4실패=136개(816만장)

2009년 총계
총1514개 대형풍선 그중 실패13개
실제 대형풍선 1501개(9006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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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국에서 가장 소통 많이 하는 사람”

趙甲濟 기자 ‘백지연의 피플INSIDE’ 인터뷰 全文





조갑제닷컴

白智娟(백지연, 이하 白): 이 분의 말 한 마디, 글 한 편은 언제나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우파의 수장, 보수 논객의 대표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분입니다. 趙甲濟(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오늘 <피플 INSIDE>에 초대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趙甲濟(이하 趙): 안녕하십니까.

白: 제가 소개해드릴 때 보수 논객의 대표, 우파의 수장 사실 그런 표현은 늘 따라다니는 표현이거든요.
趙: 그런데 그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어색해요.
白: 어색하세요?
趙: 네.
白: 어떤 점에서?
趙: ‘우파’, ‘보수 논객’ 이런 말이 저한테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특히 ‘論客(논객)’이란 말의 ‘客(객)’자 때문에 좀 한가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보면 좀 오만하게도 보이는데 저는 그냥 기자입니다. 주로 제가 쓰는 글이 거의 다 사실을 바탕으로 쓰고 우파, 보수 이렇다고 하기보다는 저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사실에 입각한 글… 하여튼 그렇습니다.

白: 그냥 ‘우파’도 아니고 최근에는 ‘極右(극우)’ 이렇게 이야기가 되거든요 그건 더 불편하시겠네요?
趙: 그건 우선 사실에 맞지 않죠. 저를 보고 극우라고 하는 사람은 저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리기 위한 매도인데,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멀쩡한 사람도 저를 보고 극우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극우라는 것은 개념 규정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폭력과 不法(불법)을 감행하는 사람’을 극우라고 그래요.
제가 쓴 글을 읽어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저는 글을 굉장히 온건하게 쓰는 편이죠. 다만 정확하게 표현을 하다 보니까 선명한 것을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또 한국에서는 요새 ‘중도’라든지 ‘실용’이라는 말이 유행하니까 어떤 문제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것, 저는 그게 싫어요. 한국에서 ‘極左(극좌)’는 있습니다. ‘극좌’가 있으니까 없는 ‘극우’를 일부러 만들어서 어떤 균형을 유지하면서 兩非論(양비론)·兩是論(양시론)적으로 가려고 하는 기회주의적인 생각인데, 저는 그게 싫다는 이야기죠.

白: 지금도 굉장히 강력한 어조로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그런 어조로 공개석상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드물거든요. 그래서 더 주목을 받으시고 또 쓰시는 글이 정치현안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셔서 발언을 하시잖아요. 그렇게 정치현안에 대해서 끊임없이 바라보시고 발언을 강하게 하시는 이유는 어떤 것인가요?
趙: 제가 기자생활을 39년간 하면서 전공 분야가 한국 현대사가 되어버렸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에 대해 취재를 많이 했고 또 기자로서는 참 운이 좋게 그 현장에 있었고 그 내막을 책으로도 쓰다 보니까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 저 나름대로는 가장 많이 아는 특히 디테일한(세부적) 부분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현대사를 놓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게 거짓말이다’하는 글을 또 써야 될 의무를 느끼는 것이죠. 대부분의 제가 쓴 글은 좀 화가 나서 쓴 글들이 많아요. 거짓말이 너무나 횡행하니까 하루에 3~4건씩 글을 쓰도록 상황이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白: 그럼 아까 ‘거짓말이 너무 많아서 내가 글을 많이 쓴다’고 말씀하셨는데,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시죠?
趙: 그렇죠.
白: 그런데 ‘소통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소통이 안 되는 인물 2위’ 이런 자료도 있었어요. 그것도 보셨나요?
趙: 보지 않고 들었는데 저와 소통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또 가장 많은 사람과 소통을 하는 사람 중에 하나일 거예요.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하고 저의 말과 글로써, 양적으로 승부를 하는 편이에요. (글을) 많이 쓰니까 또 욕도 많이 먹고 支持者(지지자)도 많고 그게 소통 아닙니까? 소통이라는 것이 어디 어려운 말을 해서 하는 겁니까? 아니면 맞춰주는 이야기입니까? 서로 논쟁하는 것도 소통이에요. 소통이라는 게 꼭 아름다운 말을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죠.

白: 그런데 이제 ‘조갑제닷컴’을 통해서 계속 글을 올리시니까 열려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많은 의견이 달리잖아요. 그런 것에서 오는 피로도라고 그럴까요? 그런 건 없으세요?
趙: 없습니다. 제가 비교적 스트레스를 덜 받는 체질입니다. 또 저도 남을 비판을 많이 하니까 당연히 또 비판을 많이 받아야 되죠. 주고받는 게 정신적으로 제일 건강하다고 합니다. 심리학자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꼬마들이 권투 글러브를 끼고 한 방을 치고 한 방을 맞잖아요? 그때의 정신 상태가 제일 좋답니다. 제가 그런 상태 같아요.
白: 맞아도 할 수 없다?
趙: 또 고맙게 때리는 사람도 있을 거고.

“욕을 해도 논리적으로 해라”

白: 고맙게 때린 것 중에 기억나시는 거 있으세요?
趙: 별로 없어요. 불행하게도 별로 없습니다.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글이나 논지는 상당히 합리적이에요. 그러나 저를 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냥 욕설이에요. 욕설, 낙서 같은 행위. 욕을 해도 저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이면 언제든지 수용을 합니다. 또 그렇게 해주는 사람한테 고맙게 생각을 해요. 요즘은 저한테 글을 별로 안 씁니다만, 康俊晩(강준만) 교수 같은 분이 저에 대해 긴 논문을 쓴 게 있었는데 주로 비판적으로 썼습니다. 그러나 읽어 보니까 이렇게 진지하게 비판을 한다는 데 대해서 제가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은 그냥 낙서예요.

白: 노무현 정부의 李炳浣(이병완) 前 대통령 비서실장이 책을 냈는데 ‘보수우파의 이론적·역사적 토대를 만든 사람이 조갑제 前대표다’ 이런 평가를 했어요. 그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이세요?
趙: 좀 과찬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과찬.
白: 과찬이다. 이병완 前 실장이 과찬의 의미로 그런 평가를 했을까요?
趙: 물론 그 다음 문장을 보면 상당히 비판적으로 썼습니다만 그분도 기자 출신이니까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白: 재미있게 읽으셨어요? 거기에 이런 표현도 나오더라고요 ‘친일·반공·쿠데타 세력을 근대 산업화 세력으로 포장해서 보수우파라는 당의정을 입혔다’ 이런 평가도 보셨나요?
趙: 그게 문장으로는 근사한데 사실은 아니죠. 그러니까 거대한 자유 민주주의 세력, 61년 동안 이렇게 근사한 나라를 만든 세력을 제가 대표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한테는 아주 과분한 이야기라는 말씀이죠.

白: 조갑제 前 대표께서 월간조선의 대표로도 알려지셨지만 사실 그 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朴正熙(박정희) 前 대통령의 전기를 쓰면서부터가 아닌가 싶거든요.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나 우리 현대사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숨어있는데요. 그걸 한 번 보시죠.

(영상)
(나래이션) 90년대 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통해 대한민국에 박정희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조갑제. 그는 조선일보 기자 시절부터 다년간 박정희 대통령의 삶을 취재하면서, 그의 업적과 리더십을 재평가하는데 힘써왔고, 이후 박 대통령을 향한 그의 발언은 화제가 되고 있는데…
(조갑제) 故 박정희 前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냐면 그분은 보통사람의 챔피언입니다. 서민적 정서를 가지고 초인적 의지력을 가졌던 분이죠.
(조갑제) 故 박정희 前 대통령은 만주 군관학교에 가서 군대라는 큰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면 되느냐 하는 조직운영의 기술을 배웠어요. 그것을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조국을 발전시키는 데 써먹었습니다. 즉, 일제시대 때 배운 걸 가지고 애국을 했으니까 과거의 일본군복, 만주군복을 입었던 그 과오를 씻고도 남는 거죠.

白: ‘누구보다도 박정희 前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이다’ 지금도 그렇게 표현하면 맞습니까?
趙: 안 맞습니다.
白: 안 맞습니까?
趙: 나는 박정희 前대통령의 지지자가 아니에요. 박정희 前대통령의 연구자입니다. 그 예가 박정희 前대통령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아는 부정적인 것은 거의 대부분이 제가 발굴한 겁니다. 요새 血書(혈서), 좌익전력, 여자관계 등 거의 대부분 제가 쓴 글을 가지고 좌파들이 잘 활용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박정희 前대통령을 있는 그대로 씁니다. 좋은 점, 나쁜 점을 다 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써놓고 보면 읽는 사람들이 ‘박정희는 위대하다’고 느끼니까 제가 박정희 前대통령을 美化(미화)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白: 사실 조갑제 前대표의 전력을 살펴보면 ‘오히려 박정희 정권과 惡緣(악연)이 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맞겠죠? 강제 해직을 두 번 당하시게 돼죠? 그리고 사실 또 (박정희 정권과) 관련해서 좋지 않은 기사, 탐사보도를 많이 하셨잖아요.
趙: 많이 했죠. 박정희 前대통령을 비판한 글을 저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는 박정희 前대통령이 권력을 잡고 있었으니까 저는 사회부 기자로서 권력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고문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쫓아다니면서 기사를 썼어요. 그래도 ‘아, 이분은 아무리 깎아내려도 더 커지는 巨木(거목)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白: 그러면 (박정희 前대통령을) 한 마디로 평가하신다면 어떻게 평가하세요?
趙: 박 前대통령은 위대한 인간이죠. 뭐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만 ‘부끄럼을 타는 초인’, ‘淸濁(청탁)을 같이 들이마시는 사람’, ‘근대화 혁명가’,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사랑했던 사람’, ‘잘 돌아가신 분’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白: 어떤 의미에서 잘 돌아가신 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趙: 영웅의 죽음을 한 사람이죠.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신 타이밍이 좋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박정희 前대통령이 성공을 했기 때문에 중산층이 생기고 민주화를 요구하고 그런 흐름 속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분이 남긴 마지막 말이 ‘난 괜찮아’였습니다. 총을 맞으니까 등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신재순 씨(박정희 저격사건 목격자)가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각하 괜찮으십니까?”라고 했습니다. 박정희 前대통령이 또박또박한 말씨로 “난 괜찮아”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난 괜찮아”라고 했던 그 말이 상징하는 게 있죠. 우리 아버지, 우리 선배, 또 우리 삼촌 세대가 ‘난 괜찮아’세대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총으로 가슴이 뚫리고도 또는 자기 아들을 전장에서 잃고도 온가족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수모를 당하고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난 괜찮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열심히 살아야 돼’하면서 후세대를 위해서 희생한 세대 아닙니까? 박정희 前대통령 세대 우리 기성세대… 저는 그분이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지만 그 말 속에 그런 걸 느낍니다. ‘난 괜찮아.’

“維新獨裁(유신독재)는 맞는 말”

白: 일부에서는 박정희 前대통령에 대한 신드롬이라고 할까요? 또 박정희 前대통령에 대한 향수, 이런 평가가 높아지면 또 바로 반대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것이거든요. ‘근대화 산업화론에 경도돼서 많은 과오를 덮고 넘어가는 우를 범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의견이나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하세요?
趙: 정치라는 것은 특히 開發途上國(개발도상국)의 정치 또 민주주의를 처음 해보는 나라, 여기에서 지도자가 되어서 어떻게 100%, 100점을 맞을 수 있겠습니까? 60점을 맞아도 잘한다고 봐야죠.
그러니까 뭘 기준으로 하느냐, ‘李承晩(이승만), 박정희 前대통령이 다스렸던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느냐’를 보면 될 것 아닙니까? 1인당 국민소득이 50~60달러, 문맹률 60% 더구나 분단 상태에서 (북한이) 언제 南侵(남침)할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미국식 자유를 줄 수 있었느냐?’ 또 ‘그것을 받아들일 국민 수준이 되었느냐?’ 이런 걸 생각한다면 링컨 대통령이 60~70년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었어도 이승만, 박정희 前대통령만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더 독재를 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점수를 매길 때 한 85점을 드리고 싶어요.

白: 그렇다면 박정희 前대통령의 功(공)과 過(과)에서 ‘過(과)’로 지적되는 부분은 人權(인권)유린, 민주주의 말살, 독재, 이런 것으로 지적이 되는데 그것 또한 시대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보시나요? 아니면 거기에 인간적인 과오가 포함됐다고 보시나요?
趙: 박정희 前대통령은 인권 유린자가 아닙니다. 우리 한국 역사상 가장 인권을 향상시킨 사람입니다. 인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예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권을 향상시킨 사람이죠. 예컨대 박정희 前대통령을 비판할 때 제일 많이 쓰는 말이 ‘維新(유신)’입니다. ‘유신독재’라고 그래요. ‘유신독재’라는 말이 맞아요. 맞습니다. 일단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죠.

그러면 박정희 前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했느냐? ‘민주주의의 이런 기능을 최소화하고 국가의 능률을 극대화한다.’ 그렇게 해서 뭘 했느냐? 제1차 오일쇼크(유가 파동)를 극복했습니다.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을 했어요. 그래서 1977년에는 중동에서 벌어들인 외화로 기름을 사오고도 남았어요. 중화학공업을 건설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했습니다.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이 먹고 사는 근본을 만들었어요. 그럼 이 두 개를 놓고 서로 비교해서 판단을 해야죠. 그렇다면 저는 독재적 측면의 부정적인 것을 30% 정도로 생각한다면 나머지 70%의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白: 박정희 前 대통령의 親日(친일)행적과 관련해서 근자에 다시 논란이 불거진 게 ‘친일 인명사전’과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만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혈서를 썼다는 것. 아까 잠깐 말씀하신 ‘내가 다 발굴해서 쓴 기사입니다’가 이것도 그렇다는 말씀이신가요?
趙: 포함되죠. 박정희 前대통령이 혈서 쓰는 것을 보통학교 교사 시절에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서 (박정희 前 대통령이) 혈서 쓰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본 사람이 저한테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 前대통령을 親日派(친일파)로 볼 수가 있습니까? 아니, 혈서를 쓰면 친일파입니까? 친일파라는 말은 이게 사람을 잡는 표현입니다. 아주 非역사적, 非인간적 표현이에요. 이런 비교를 하면 어떻습니까?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받은 것은 보여주지 않고 엉덩방아 찧는 장면만 계속 보여주면서 ‘김연아는 3류다’라고 하는 것이나 박정희 前 대통령이 이룩한 위대한 국가 건설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혈서 쓴 이야기 만주 군관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에만 집중해서 ‘너는 친일파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떤 인간을 친일파라고 하면 그 사람 생애 전체에 있었던 한 1~2%가 되는 걸 가지고 99%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하는 겁니다.
白: 그러면 사실…
趙: 친일파라는 명칭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명칭이 잘못되면 모든 게 다 틀려버려요. 그건 중대한 명예훼손입니다.

白: 비판하는 쪽에서는 ‘어찌 됐든 국가의 원수를 지낸 사람이 일본에 혈서를 통해서 충성을 맹세한 것 아니냐, 여기에 대해서는 지적을 한다’ 이런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趙: 기록은 좋아요. 기록은 저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을 친일파라고 斷罪(단죄)해서는 안 되죠. 박정희 前 대통령을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의 소위 친일파라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건국하자마자 ‘내가 일제시대 때 배웠던 기술’, 박정희 前대통령의 경우는 군사 기술이죠. 군사기술을 가지고 우리 국군을 만드는 데 쓴 것이죠. 내가 배웠던 법률, 행정지식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쓴다고 해서 그 기술을 써먹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럼으로써 자신의 일시적인 친일 행적을 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왜 그건 다 무시하고 과거완료형으로 돌아가서 애국자를 친일파라고 합니까? 박정희 前대통령을 친일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애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白: 정리를 하면 ‘친일 행적은 있었으나 박정희 前 대통령을 친일파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인생 전체를…’ 이렇게 개념 정리하는 것이 옳다?
趙: 그렇죠. 박정희 前대통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친일 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던 사람들을 보면 내가 보니까 애국자들이 많아요. ‘서정주’, ‘안익태’, ‘장면’ 선생 다 그런 분들이죠. 그분들 다 애국자입니다. 세계가 알아주는 성공스토리의 주인공들을 다 우리 손으로 잡아 죽이면 뭐가 남습니까? 이게 허무주의 아닙니까? 허무주의. 그래서 우리 교육이 됩니까?

“역사는 榮辱(영욕)을 같이 가지는 것”

白: ‘역사에 분명히 남기자’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광화문 광장은 이승만 광장으로 하고 김포공항은 박정희 공항으로 하자’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건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가요?
趙: 그건 아주 절실한 문제입니다. 국가 상징물이라는 게 있어요. 이것은 국민교육에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예컨대 우리가 쓰는 돈을 한 번 보세요. 돈에 지금 누가 들어있습니까? 이순신, 이퇴계, 이율곡, 신사임당, 세종대왕입니다. 전부 조선조 사람이에요. 거기에 한두 자리는 이승만, 박정희 前 대통령을 넣어야죠.
공화국을 만들면 그 나라의 화폐는 공화국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애국자를 넣어야 됩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그렇게 해요. 그 다음에 광화문 광장은 거기에 서야 될 사람이 있죠. 이승만 前대통령의 동상이 서야죠. 경복궁은 조선조 왕궁이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광장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前대통령을 거기에 세워야 우리 역사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우리가 손자들의 손을 잡고 그 앞을 지나가면서 ‘이분이 이승만 前대통령이다. 이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자유민주주의, 韓美(한미)동맹 그리고 교육 확충에 의해서 이렇게 잘살고 있단다’라고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상징물 아닙니까?

白: 지금 그렇게 바꾸자고 하면 아마 사회적으로 거의 양분이 돼서 투쟁할 것 같은 그런 생각도 들고요. 이미 또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다른 쪽에서는 ‘광화문 광장은 金九(김구) 광장으로 해야 되고 김포공항은 金大中(김대중) 공항으로 해야 된다’라는 의견이 바로 나오더라고요. 그렇게 또 주장하시면 완전히 양분되지 않을까요?
趙: 아니, 시청자 여러분께서 들어보시면 제 말에 무슨 무리가 있습니까? 김구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죠. 김구 선생… 그러나 김구 선생은 건국에는 조금 반대했던 분이죠. 마지막 단계에서 반대를 하셨던 분이죠.
그러니 이승만 前 대통령이 설 자리죠 거기는. 建國(건국) 대통령 아닙니까? 또 그분이 만든 국가 노선이 박정희 前대통령에 의해서 개선되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게 아닙니까? 물론 그분이 물러날 때 4·19 의거로써 물러난 汚點(오점)은 있습니다만 역사라는 것은 영욕을 같이 가지는 것이지…

白: ‘영욕을 같이 가진다’라고 말씀하시니까 후임 대통령, 지금으로서는 前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두루 해봐야 될 것 같고요. 또 노무현 前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보면 잘한 것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는 것 같고요. 잘못된 것에 대한 대단한 지적이 많이 나오거든요. 몇 개 추려봤거든요. 한 번 보고 말씀을 나눠보죠.

(영상)
(나레이션) 6·15선언은 반역선언이다. 盧武鉉(노무현) 前대통령은 逝去(서거)가 아닌 自殺(자살)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 김대중, 노무현 前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으로 논란의 중심 선 조갑제.
(조갑제) 노무현 前 대통령의 총점을 매기면 얼마가 되느냐 아마 마이너스 얼마 될 겁니다. 마이너스.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노무현 前 대통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제로인데 뭘 한다는 게 전부 나쁜 짓만 해놓으니까 마이너스가 됐다 이런 뜻이죠.
김대중씨는 우리 민족 앞에서, 국가 앞에서, 헌법 앞에서 우리 국민 앞에서, 이 세계 앞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첫째는 6·15 반역선언을 만들어내서 대한민국을 김정일이 판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이런 위기는 지난 10년 동안 집중됐어요. 대못을 박았어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대한민국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어요. 머리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박은 대못이, 제가 오늘 아침에 대충 계산을 해봤습니다. 한 여덟 개 됩니다.

白: 지금도 나왔습니다만 ‘김대중, 노무현 前 정권이 대한민국의 심장과 뇌수에 박아놓은 대못 여덟 개가 있다’
趙: 네, 그렇습니다.
白: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가요?
趙: ‘6·15 선언’이 제일 중요하죠. 저는 김대중 前대통령의 역사적 평가가 6·15 선언 전과 후로 많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6·15 선언 전에 김대중 前대통령이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것은, 저는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6·15 선언 이후에 이분이 헌법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버렸어요. 이것은 헌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失效(실효)를 선언해야 됩니다. 萬惡(만악)의 근원입니다. 6·15 선언이.

“6·15 선언의 남북 긴장완화 기여는 거짓말”

白: 지금 6·15 선언을 그렇게 평가하셨지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남북으로 갈려서 냉전이 아직도 남아있는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가장 큰 공을 이뤘다’ 이런 평가가 나왔기 때문에 그것이 또 노벨평화상으로 연결이 됐었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의견을 말씀하시니까요
趙: 아니, 남북 간에 긴장 완화가 되었다는 그런 거짓말을 어떻게 합니까? 북한이 核(핵) 개발을 했는데 무슨 긴장 완화가 됐습니까? 우리는 지금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북한이 핵 개발을 하지, 두 차례나 서해에서 도발하고 최근에는 금강산에서 우리 관광객을 사살하고… 이게 긴장 완화입니까? ‘긴장 완화가 되었다’, ‘화해가 되었다’는 거짓말을 한 다음에 자기들의 반역적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거죠. 거기에 속으면 안 되죠.

白: 모든 문제에 찬성과 반대가 따로 있고 또 이제 추종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따로 있으니까 모든 현안이 이렇게 나뉩니다만 이런 것에 대한 비난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대중 前대통령의) 영결식 날에 맞춰서 그런 비난적인 글을 쓸 필요가 있었느냐’ 또 ‘노무현 前대통령의 서거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느냐’와 관련해서 꼭 표현을 그렇게 해야 되고 꼭 시점이 그러해야 했느냐…

趙: 노무현 前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서거’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자유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절대로 노무현 前 대통령의 서거라고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아니고 제가 비판한 건 뭐냐? 언론이 ‘자살’이라고 해야지 ‘자살’이라고 표현해야 될 때 ‘서거’라고 했어요. 그러나 ‘서거’는 편안하게 돌아가신 걸 증거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까지 언론이 사실 보도를 糊塗(호도)할 수 있느냐’라고 해서 제가 쓴 거예요.
‘언론은 사실 보도에 충실해야 된다’ 그리고 형사피의자 신분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國民葬(국민장)은 좀 과하다’라는 주장을 제가 한 거고 그 다음에 김대중 前대통령을 國葬(국장)으로 한 것은 저는 과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관례에 어긋납니다. 현직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에만 국장으로 한다는 게 우리나라에서 이미 몇십 년 동안 확립된 전통입니다.
왜 김대중 前대통령에게만 특별대우를 해줍니까? 이승만 前대통령도 가족장을 했습니다. 그러면 김대중 前대통령이 이승만 前대통령보다 한 급 위의 대통령입니까? 이것은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過恭非禮(과공비례)를 한 것이죠. 그 다음에 지난 5월과 8월 노무현, 김대중 두 前대통령의 장례식 기간 중에 우리 언론이 보수 신문까지 포함해서 어떤 식으로 보도를 했습니까? 두 사람을 완전히 성인군자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언론이 역사적 인물을 그런 식으로 보도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과오와 업적을 잘 가려서 냉정하게 써야 됩니다. 그런 식의 미화 일변도에 대해서 그나마 저라도 균형을 좀 맞춰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김대중 前 대통령의 행적 중에서 이 50개 항목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하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그때 올렸던 것입니다.

白: 알겠습니다. 조갑제 前대표를 둘러싼 평가가 워낙 엇갈립니다. 보수 쪽에서의 얘기와 또 진보 쪽에서의 얘기가 워낙 엇갈리기 때문에 제가 그 상반되는 얘기를 들어봤거든요.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조갑제에 대한 상반된 평가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 편집장님이 쓰신 글은 우리 시민단체들이 참고를 많이 하고 있죠. 그런 차원에서 좋은 글을 많이 쓰셨고,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상당히 소신 있고 올바른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확고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중권- 시사 평론가) 그의 견해는 시대착오적이죠. 그 다음에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정신적인 발전 수준에 맞지 않고, 그분이 하는 얘기에 저는 동의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위험하다고 보는데, 형식적인 위험성은 그렇게 크지 않은 거 같아요. 왜냐하면 보수주의자들 중에서도 이제 그분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분들이 많지 않거든요.

(최민희- 前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사실에 기초해서 사람들을 설득하기보다는 불분명한 어떤 충격적인 사실을 드러내고 그것을 선전·선동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기자가 해야 할 사실 보도와 그에 기초한 설득이 아니라는 거죠. 조갑제씨는 보수라기보다는 ‘극우파시스트적 경향을 띠고 있는 보수의 오른쪽 극단이다’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白: 평가 중에 좋은 의견도 있습니다만 마지막에 들린 의견이 ‘극우’ ‘파시스트’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는데요.
趙: 파시스트가 누가 파시스트인지 아십니까? 지금 金正日(김정일)이 파시스트예요.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金日成(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毛澤東(모택동)이나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그게 ‘전체주의자’인데 그러나 한쪽에서는 전체주의자라고 하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파시스트’라고도 하는데, 파시스트의 정의는 뭐냐 하면 일반 사생활까지 다 간섭해서 思想(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언론의 자유를 가장 존중하고 저 스스로 언론의 자유를 아주 만끽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 파시스트라는 용어는 김정일한테 돌려주고 싶어요.

“보수세력은 행동으로 進步(진보)한 사람”

白: 대한민국에서 ‘극우·보수’와 ‘진보’ 이렇게 나눠서 논란이 많았어요. ‘대한민국의 보수는 무엇이고 진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 이런 질문은 아주 많이 받으셨죠?
趙: 대한민국의 보수세력이 진보세력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진보세력이에요. 그리고 지금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은 수구세력입니다. 왜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폭력을 일삼으니까, 거짓 선동을 밥 먹듯이 하니까 그 사람들이 진보로 자처한, 진보로 위장한 수구세력이죠. 역사의 퇴보세력이죠. 퇴보세력입니다.

白: 지금 ‘우리 보수가 오히려 진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보수가 그렇고 진보는 수구다’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시거든요.
趙: 아니, 제 말이 맞습니다. 진보가 뭡니까? 진보는 역사의 발전 단계에서 진보라는 말을 쓰는데, 역사 발전 단계에서 자유를 향해서 나아가야 되죠. 인권을 향해서 나아가야 되죠. 풍요를 향해서 나아가야 됩니다. 바로 대한민국을 만든 세력이 자유를 확대시켰고 인권을 향상시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요를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행동으로 진보를 한 사람인데 자칭 진보세력은 말로 진보를 하지, 말로 진보.

白: 지금 말씀하신 자칭 ‘진보세력’이라고 하는 쪽에서는 보수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금 말씀하신 자유를 향하여, 풍요를 향하여, 인간을 향하여… 이게 뭐냐 하면 ‘가진 자만의 자유와 평화를 향하여’, ‘없는 자는 영원히 없고 그래서 오히려 분배가 없고 평등이 없다. 이래서 수구다’라고 합니다.
趙: 그게 전형적인 좌파선동인데 ‘貧益貧(빈익빈) 富益富(부익부)’ 그래서 나온 말이 ‘양극화’아닙니까? 예컨대 ‘李健熙(이건희)’씨와 ‘노숙자’를 비교하면 거기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겠죠. 그거만 딱 들이대면서 ‘양극화’다 그것은 기계적인 평등이에요. 평등의 개념이 뭡니까? 기회의 평등이죠.

白: 그렇죠. 문제는 평등과 분배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기회의 평등을 말씀하셨는데, ‘기회의 평등이 올 기회조차 없어지고 고착화되어 간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간다’
趙: 아니, 노무현 前대통령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통령이 됐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장사꾼 출신이 대통령이 됐어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불공평한 사회이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행하다’ 하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선동을 해서 한국 사람들이 남 탓하는 것, 남 탓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 나라가 발전을 하겠습니까?

白: 진보 쪽에서 말하는 분배와 평등의 개념이 잘못된 거다. ‘수구 보수만을 위한, 기득권을 위한 발전만 비균형적·비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이런 주장이 지배적으로 많아지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趙: 자칭 진보세력, 이 사람들이 끈질깁니다. 나름대로 이념 무장 그게 잘못된 이념이지만, 이념 무장을 했기 때문에 어떤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고 법을 과감하게 짓부수고 하는 데 대해서 보수 세력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보수세력의 행동에 한계가 있습니다. 보수세력은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돼요.
보수세력은 법을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무례한 행동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한국 사회의 주인이기 때문에. 보수세력이 한국의 주인이고 주류세력 아닙니까? 그럼 주인이 하는 행동과 주인이 아닌 사람이 하는 행동은 차이가 있는 거죠.

白: ‘보수세력의 첫 번째 조건이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아마 많은 분들이 반발하실 것 같아요. 조갑제 대표께서는 보수를 다른 식으로 개념정의하셨지만, ‘수구’라고 불리는 기득권 계층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부도덕성이거든요.
趙: 한국의 주류세력인 보수 세력이 반성할 게 없느냐? 있습니다. 저는 항상 그걸 주장을 해요. ‘보수 自淨(자정)을 해야 된다.’ 특히 정치, 관료, 공직자는 淸廉(청렴)해야 되죠. 깨끗해야 됩니다. 가난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청렴해야 되고 군대를 갔다 와야죠. 그리고 세금을 정확하게 내야 되고 기업은 비자금을 이제 그만 만들어야 되죠. 그러나 잘못한 걸 더 과장을 해서 절대적으로 많은, 잘한 것을 무효화시키려는 게 좌파세력의 선전·선동이니까 보수세력의 문제점을 이야기를 하면 거기에 또 넘어갈까 싶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法治(법치)를 등한시 하는 이명박 대통령

白: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와 관련한 얘기를 좀 나눠보면요. ‘보수층의 지지를 얻고 출범했다’라고 이야기가 됐었지만 사실 보수층으로부터 지금 상당한 비난도 나오지 않습니까? 어떻게 평가하세요?
趙: 이명박 대통령이 우선 잘한 저은 경제 관리를 참 잘했습니다. 그리고 對北(대북)정책도 최소한 뜯어 먹히지는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그 부분만큼은 잘한 거죠. 그러나 아쉬운 게 하나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은 ‘法治(법치)확립, 법대로 하라‘는 이 부분에 대해서 너무 등한시하는 것 같아요. 예컨대 11만5000명의 공무원들이 통합 노조를 만들어서 민노총 산하에 들어가기로 결의를 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법률 위반입니다. 공무원들이 그런 정치활동을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것이 불법이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제가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법대로 하지 못하느냐?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느냐?

白: 지금 ‘눈치를 본다’고 표현하셨는데 대통령의 직위에 있으면서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趙: 퇴임 후를 생각을 한다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대통령은 5년밖에 못하는 겁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은 목숨을 걸어야 돼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자리입니다. 아니 좌파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요. 그런데 대통령은 그렇게 막강한 자리에 있으면서 왜 자신을 걸지 않습니까? 목숨을 걸든지, 인생관을 걸든지, 걸고 비장한 자세로 나와야죠.

白: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 노선’과 관련해서 이렇게 평가하셨더라고요. ‘좌도 우도 아니고 중도라고 이야기하는 희한한 개념을 만들어서 이것은 상당히 기회주의적인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던데요. 그렇게 평가하실 수도 있지만 좌·우와 같은 이념이 아니라 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되는 거라고 보지는 않으십니까?
趙: 중도 실용에서 말이죠. 우선 ‘실용’은 괜찮아요. 그런데 ‘중도’라는 것은 ‘좌와 우 사이에서 가운데로 가겠구나’하는 중간노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중도실용 정책이 親(친)서민정책으로 가는 것은 좋습니다. 또 복지정책도 그렇게 가는 건 좋아요.
그러나 법치라든지, 대북관계, 안보부분에서 중도실용을 쓰면 어떻게 되느냐? ‘적과 동지 사이에서 중립이다’, ‘불법과 준법 사이에서 중립이다’, ‘좋은 게 좋다. 문제를 안 일으키면 좋겠다. 문제가 있어도 그건 덮고 넘어가자’ 이게 중도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기강이라든지 법치가 무너지는 것이죠.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제는 법치확립 단계로 가야 성숙이 돼요.

세종시 논란, 국민투표가 돌파구

白: 현재 시점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 중에 하나가 ‘세종시’ 문제인데요. 이명박 대통령은 ‘양심을 걸고 百年大計(백년대계)를 생각할 때 이대로 할 수 없다’라는 의견이고요. 그래서 지금 정부의 수정안이 나온다고 하고요. 朴槿惠(박근혜) 前 대표의 경우에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된다’ 이게 팽팽히 맞서서 ‘보수 측에서 분열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趙: 아니,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쟁점이 있는 문제는 그런 여러 가지 의견을 개진을 해서 하나의 결론을 맺는 것이 민주주의의 위대한 자정능력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소 의견이 갈리는 건 좋아요. 원래 이런 것은 과거의 권위주의 시절에는 대통령의 명령으로 결정이 되어버리고, 뭐 김정일 같은 경우는 김정일의 말 한 마디로 결정이 되지만 이것은 그래도 民意(민의)를 다 종합하는 과정이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이게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성이죠.
여기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수습할지 그게 궁금해요. 물론 정부 쪽에서 좋은 대안을 내겠죠.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던 사람들도 동의를 한다면 국회에서 대체입법을 만들어서 통과가 되겠죠. 그렇지 않는다면 아마 국민투표로 가야 될 상황도 있을 겁니다.

白: 국민투표로 간다는 의견을 가장 먼저 내신 분 중에 한 분이시잖아요. ‘국민투표에 부칠 사안이냐 아니냐’, ‘국가 안위와 관련된 것이냐 아니냐’는 그것 자체로도 또 논란이 있더라고요.
趙: 논란이 있죠.
白: 그런데 지금 청와대와 정부 내에서도 국민 투표안을 선뜻 내놓기는 어려운 상황 아닐까요?
趙: 그 전에 노력을 다 하겠죠. 노력을 해서 국회 안에서 또는 정치권 안에서 자율적으로 해결되는 게 가장 좋죠. 그러나 국민투표도 최종적으로 생각을 해봐야 되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수도를 반 토막 내서 충청도 내륙지방에 옮기는 것은 국가운영의 효율성 측면에서 문제가 심각하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다 심각한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1972년까지 북한의 헌법도 서울을 수도라고 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 민족사에서 서울이 차지하는 정통성, 하나의 말뚝으로서 위치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노무현 前 정부가 천도를 하려고 한 것 아닙니까? 그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심대한 타격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저는 본래의 뜻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것은 다시 헌재의 違憲(위헌)판결에 의해서 우리가 막았습니다. 그래도 수도 분할, 반 토막을 내서 거기에 갖다 놓는다고 해도 서울의 정통성은 약화되는 것이고 장관이 서울시에서 세종시까지 왔다갔다하면서 하루에 2~4시간씩 길에서 허비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 타당성에 대한 결론은 저는 쉽게 정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白: 결국 이 문제는 대통령이 직접 설득해서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보시는군요?
趙: 지금은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나와도 안 되겠습니까?
白: 알겠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나면 불행해질 자격이 없다”

白: 아까 말씀하실 때 ‘거짓말이 보인다. 그걸 지적하고자 글을 쓴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나라를 위해서 좌와 우뿐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趙: 그러고 보니까 제가 제일 중요한 말씀을 안 드린 것 같은데, ‘우리 국가의 목표가 뭐냐’ 하는 것을 모든 국민들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헌법 1조, 3조, 4조에 다 들어있어요.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아닙니까?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 ‘따라서 북한지역까지 통일을 해야 한다’라는 게 헌법 제4조에 적혀있습니다. 우리는 자유통일을 해서 북한의 동포까지 우리처럼 자유를 누리면서 살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은 간단하죠. 첫째, 자유로워야 되고, 번영해야 되고, 통일되어야 되고, 강력해야 됩니다. 즉 자유 통일을 하고 一流(일류) 국가를 만든다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는다면 자질구레한 이견은 다 해결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생활하고 있다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보람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느껴질 수가 없어요.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나라, 가장 보람된 인생을 보낼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나면 불행해질 자격이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白: ‘불행해질 자격이 없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여러 가지 의견을 잘 들었고요, 저는 반대되는 의견 쪽에서 질문을 많이 드려봤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 여러 가지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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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이 낳은 스타 정석기 장군

자랑스러운 개령인 정석기 장군을 찾아서


정태하 기자, sangrocks@hanmail.net

김천이 낳은 스타 鄭石基 將軍은 1953년 경북 김천시 개령면 덕촌1리에서 출생하여 현재는 청주시에서 정신지체장애(1급)와 치매를 앓고 계시는 84세의 노모 林春善여사와 처,金淑子 여사등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으며 태어난 고향에는 숙모님과 처가 장모님 및 중학교 은사님이신 강갑석 선생님과 중학교 교장선생님을 포함하여 지역 기관장 등이 살고 계시며 가족중 장녀 현영 씨는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서 공주교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고 자 재훈 씨는 천안 고신 대학원 졸업예정에 있다.

정 장군은 어린시절 김천시 개령면 덕촌리에서 줄곧 성장 하였으며 김천시 개령면 서부 초등학교와 개령 중학교를 거쳐 대구 경북공고,광주대학교, 영남대 대학원 및 대전대 최고경영자 과정 (대학,대학원,최고 경영자 과정 모두 야간에 수학)을 수료 하였으며 고향에 대한 소희는 늘 꿈을 키우고 이룰수 있는 육체와 마음의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 매김되어 있기 때문 이라고 한다.


가난한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난 정 장군은 김천중학교 입학시절 그 당시 등록금 6천2백원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8KM 떨어진 첩첩산골 서당에서 천자문,동문선습,개몽편,명심보감등 1년간 漢字공부를 하다가 배움에 대한 열정 때문에 개령중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3년여 동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수학하게 되었다.

또한 고등학교시절 3학년 2학기 때는 부족한 학비를 충당 하고자 부산에 있는 태광산업에 6개월 여 근무를 하다가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고교 졸업식도 참석치 못한채 청운의 꿈을 품고육군 3사관학교 사관생도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특히,중학교.고등학교 시절에는 학생회장을 엮임 하였으며 사관생도 시절에는 명예 위원장까지 엮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하였다.

정 장군은 못다한 학업의 꿈을 이루고자 소령때 보병학교(광주) 교관을 하면서 16Km 이격된 학교로 통학(야간)을 하였으며 중령때 영남대 학군단(대구) 교수부장 하면서 남산동에 있는 대학원 통학(야간)으로 공부를 하였으며 장군 진급 후 육군본부에서 대전으로 통학 대전대 최고 경영자 과정을 수료 하였다.


지금도 정 장군은 37년 동안 오직 군인의 길을 걷고있는 것을 천직(전투복은 壽衣(수의)요,군번은 墓碑(묘비)라는 각오) 으로 삼고 현재까지 올인 하고 있으며 권력과 富,명예 중에서 군인으로서 최우선 가치인 명예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오직 한 우물만을 파겠다는 자세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국가관은 “天下雖安 亡戰必危”(천하수안 망전필위;천하가 비록 평안 할지라도 전쟁을 잊어 버리면 나라가 위태로워 진다)의 각오와 평소 생활 신조는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盡人事 待天命”(진인사 대천명)의 신념으로 일관하고 있다.

공직생활 35년간 위관 시절에는 주로 중동부 전선의 DMZ등 야전과 기계화 부대에서 주로 근무를 하였으며 령관 시절에는 (소령) 보병학교 교관과 (중령) 대대장,영남대 교수부장,육본 작전장교 (대령) 53사 연대장,육본 상황실장,2군 교훈과장 등을 거쳤으며 장군 시절에는 국방부 개혁위,육군본부 감찰차감,보병학교 교수부장,76 보병 사단장 등 1973.1.8, 3사관교에 입교하여 2009년 현재까지 37여년간 DMZ,해안,전,후방 (서울,대구,대전,광주,부산 등)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30번 이상 이사를 해가면서 근무를 하였으며,현재 보직은 교육사령부 예하 BCTP(전투지휘훈련단) 관찰관의 임무를 수행중에 있다.

이제 2010년 명예로운 전역을 눈앞에 두고있는 정 장군은 예편을 하게 되면 공직생활 37여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교 교단에서 後學을 위해 헌신을 하겠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특히,현역에 근무하면서도 모교인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방문하여 후학들에게 국가 안보의 중요성과 目標(꿈)가 있는 비젼과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수립하여 실천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존경하는 인물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主人精神(주인정신은 내가 조국에,사회에,조직에 주인이라는 생각)을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이는 고교시절 “흥사단 아카데미”활동을 통하여 익힌 정신이기도 하였으며 보고싶은 인물로는 중학교시절 특별한 관심을 가져준 강갑섭 은사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거동이 불편하고 나이가 연로하여 지금은 만나 뵈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죄송 스러움 을 감출수가 없다고 한다.

평소 가족에 대한 애정 표현은 늘 어머님께 먼저 문안 인사를 드리고 뒷바라지 해준 아내에게 사랑합니다! 고마워요 등 스킨쉽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기타 하고싶은 말은... 목표(꿈)를 가지고 생활하되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더불어서(공동체 사랑)살아가는 사회,배려하는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형성 하면서 생활을 하고 싶다고 한다.

개령중학교 17회 동기생인 임 창곤씨(구미거주)는 정 장군은 학창 시절부터 늘 우등을 차지 하면서도 남들보다 리더십이 특출하였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우정을 나누기를 좋아하며서도 혼자서 꿋꿋하게 학업에 열중하면서 일찍이 장군의 꿈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동창회등 길,흉사 시에는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꼭 참석 하는등 동기들 간에도 부러움을 사고 있으며 고향 어르신들에게 칭찬이 자자함은 물론 현재 거동이 불편하신 노모들 손수 수발 하는등 부모 곤경은 및 자식의 孝(효) 를 다하고 있으며 정 장군은 그동안 고향의 향수와 동기들을 자주 찾는 이유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뿌리"의 중요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2002년 6월 지병으로 군인의 참된 삶을 살다간 김천 봉계출신 벽송 정승화(전 육군참모총장, 계엄군 사령관) 장군이 자랑스러운 김천인 으로 자리를 하고 있다.


(주요 포상은)
육군참모총장 표창5회/국방부장관 표창 4회/ 농림부장관 표창 1회/ 국무총리 표창 1회/대통령 표창2회/대한민국 정부포장(천수장) 등 다수 있으며

(주요 프로필)
*경북 김천시 개령면 덕촌리 출생
*김천 개령 서부초등학교 졸
*김천 개령 개령중학교 졸(1970년, 제17회)
*경북공업고등학교 화공과 졸(1973년, 제17회)
*육군3사관학교 제11기 졸업 및 소위 임관(1974년)
*광주대 법학과 학사(1985년)
*영남대 행정대학원 석사(1993년)
*보병 제66사단 187연대장,66사단 참모장(1997년-대령)
*보병 제53사단 126연대장(1999년 - 대령)
*육군본부 상황실장(2001년 - 대령)
*2군사령부 교육훈련과장(2003년 - 대령)
*2005년 1월 1일 (장군) 준장으로 진급.
*2005년 한남대 국방전략연구소 연구원 역임(첫번째 보직)
*2005년 국방부 "국방연구발전위원회 지원부장"역임 (두번째 보직).
*2006년 육군본부 감찰 차감 역임( 장군진급후 3번째 보직)
*2006년 대전에 있는 교육사령부<자운대>의 지원부장 역임 (4번째 보직)
*전남 장성에 있는 상무대에서 보병학교 교수부장 역임(5번째 보직)
*2007년 11월 홍천에 있는 보병 제76사단장(준장)역임 (6번째 보직)
*2009년 5월부터 12월까지 포천에 있는 제5군단(승진부대) 부군단장 역임(7번째 보직 - 마지막 보직임).
이렇게하여 2004년 10월 15일에 장군으로 진급(준장)하여 정확하게 5년(2005년 1월 1일부터 2009년 12월 7일까지)동안 준장(스타)을 역임 전역(예편)하는 정석기 장군은 1974년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2009년까지 약 37여년 동안 조국과 국가를 위해 온몸을 바친 정석기 장군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인터넷신문의 선두주자 뉴스타운 Newstown / 메디팜뉴스 Medipharmnews)

[뉴스타운www.NewsTown.co.kr200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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