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41년전 이승복 학살 증인 김익풍

1968년 울진-삼척 생포 무장공비로서
당시 상황 생생하게 설명

"이승복 조작은 말 자체가 되지 않는 한심한 것"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기는 해도 강원도 12월의 추위는 여지없이 겨울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1968년 12월9일로부터 만 41년째가 되는 2009년 12월9일 정오 강원도 용평면 노동리 이승복 기념관 내 계방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4기의 묘역 앞에서는 41년 전 이 날 비명에 숨져간 어린 넑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추모제가 군악대의 장중한 주악 속에 엄숙하게 거행되고 있었다.

▲ 이승복 군 41주기 추모제가 열린 강원도 평창군 계방산 기슭 고 이승복 군 묘 앞에서 분향을 하고 있는 김익풍씨. 그는 이 날 참회어린 마음으로 묘 앞에 섰다. ⓒkonas.net



이 날 추모 순서에 의해 헌작(獻爵 : 제사 때에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일)과 첨작(添酌 : 제사 때에 종헌으로 드린 잔에 다른 제관이 다시 술을 가득히 채워 붓는 일)이 이어지고 고인을 조상(弔喪)하기 위하여 조총(弔銃兵)의 조총이 발사된 데 이어 진행을 담당한 박병훈 이승복 기념관장의 안내에 따라 바바리 코트를 받쳐입은 남루한 복장의 한 남자가 묘역으로 올라왔다.

그는 다름 아닌 1968년 10월부터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하며 1950년 6·25전쟁 이후 다시 한번 북한 공산주의의 만행이 어떤 것인가를 전 국민에게 느끼게 한 울진-삼척 무장공비의 일원으로 남파됐던 무장공비 출신 김익풍(69세. 구리 거주)씨였다.

남파 당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부대 소속 정치부소대장(중위)으로 무장공비 120명중의 일원으로 조원 15명을 대동하고 동해안으로 침투한 김익풍씨는 얼마 되지 않아 아군에 발견돼 끈질긴 추적을 받은 끝에 조원 14명은 모두 사살되고 김씨만 생포되었다.

이승복 군 묘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고 묵념에 잠기던 김씨는 조용하게 술잔을 올리고는 참석한 250여명의 추모객 들에게 깊숙하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앞좌석에 앉아 있는 고 이승복 군의 형인 이학관(55세)씨와 손을 맞잡았다. 이어 그 옆에 서있던 학관씨의 부인에게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다. 이 날 울진-삼척으로 침투했던 생존 무장공비와 그 무장공비로 인해 네명의 가족이 학살되고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정신분열증으로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한 가족이 41년 만에, 그것도 학살된 그 날 우연한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날 추모행사가 끝나고 기자는 이 날 추모행사를 공동으로 주관하고 지난 11년 동안 어느 기관 단체가 크게 알아봐 주지 않는 가운데서도 이승복군의 거룩한 반공 희생정신을 오늘 우리사회 안보교육의 상징이자 또 다른 지표로 삼아야 한다며 추모제에 참석하고 최근 들어서는 '이승복 역사 복원'을 주창하고 있는 권오강 대한민국 육·해·공군·해병대 영관장교 연합회장과 자리를 마주했다.

이 날 권오강 회장은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서 평창으로 오는 차량 안에서 김익풍씨가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 회원들에게 알리고 회원들의 모금을 통해 모인 성금 100만원을 행사장에서 본인에게 전달하는 인정을 베풀기도 했다.

다음은 이 날 함께 대화식으로 나눈 인터뷰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임.

▲ 이승복 추모제를 영관장교 연합회가 11년째 해오고 있다. 하나의 역사복원 운동인데, 행사를 하게 된 계기는?

- 우리 영관장교 연합회는 31주기인 11년 전부터 이승복 묘소를 찾아 참배해 왔지만 40주기 이전까지는 찾아오는 사람도, 다녀간 사람도 별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념관장도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고, 눈 쌓인 묘소 행 돌길과 제단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때 우리 학생들에게 반공교육의 상징이었던 이승복 사건이 어느덧 흘러간 이야기로만 되어가듯 그를 생각하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사라져가고 있음을 볼 때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온 우리 노병들은 잊혀져 가는 이승복 역사 되찾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김익풍씨가 묘 앞에서 잠시 묵념에 잠기고 있다. ⓒkonas.net



▲ 이승복 역사복원 운동의 필요성은?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친 이승복군의 반공정신은 초등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아온 반공교육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우리사회의 일부에서는 남북 화해협력 분위기에 매혹되어 '우리민족끼리'니 하며 친북 좌파세력들의 시대착오의 환상과 맹목적인 추종이 우리사회에 깊숙이 침투하면서 표면화돼 국민의 안보의식을 약화시키고자 친북 좌경세력들이 온갖 책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승복 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며 공비에게 항거하다 학살된 사건이 허위, 날조, 조작된 사건이라고 언론에 보도하고 심지어는 대중 집결장소인 지하철역과 부산역 광장에서 이 기사와 관련한 내용이 거짓이라는 '오보전시회'를 열면서 우리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복 관련 기사가 진실임이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돼 허위 보도한 관련자들에게 민·형사상 처벌을 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실된 이 역사와 과거 정권에서 삭제되거나 배제되었던 교과서에 이승복 반공희생정신을 다시 수록하고 교정에서 사라진 동상을 세우고 장학사업 발전과 기념관을 많은 관람객이 찾을 수 있도록 지난날 희석된 것들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 이 역사 복원을 위해 오늘도 결의대회를 하고 이전에도 관련 기관에 이 운동의 확산을 여러차례 건의한 걸로 아는데?

- 이승복 역사 다시 살리기 운동은 강원도가 중심이 돼 전 국민이 함께 하는 운동으로 강원도는 물론 청와대, 국무총리, 교육과학기술부장관 등 정부 관련 주요 부처와 전국시도 교육감, 국회와 정당대표, 언론·방송은 물론 시민사회단체 등 1,500여개 기관에 이 내용을 알려 왔습니다.

이승복 역사복원 운동은 잘못된 세력에 의해 잘못 오도되고 조작, 왜곡되었던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는 운동입니다. 반드시 이 역사복원 운동이 조기에 성공하여 역사에 길이 보전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고향과 당시 소속과 계급은?

- 평안북도 선천이 고향으로 아버지는 군 당위원장을 하셨다. 중류 이상의 가정이었다. 민족보위성 정찰국 정찰국 124군부대 소속으로 당시 중위였다. 정치부 소대장인데 북에서는 소위였지만 남파되면서 중위를 달았다. 북에서는 대체로 위장계급을 주는데 남파 시에는 일 계급을 더 준다.

▲ 많은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내려올 당시의 목적은?

- 각종 정보를 파악하고 일개 가옥(가족)이나 집단을 포섭하는 것과 요인을 납치해 대동 월북하는 것이었다.

▲ 이승복 학살과 연관이 있는가? 왜 산골 농부를 포섭할 이유가 있나?

- 북에서는 그런 교육을 받는다. 포섭에 가장 용이한 자가 농촌이나 산 속에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북에서 강원도 울진 삼척은 대한민국에서 못사는 지역 사람으로 보고 이북을 지지하는 계층으로 본다. 구성원들이 또 드믄 드믄 산다는 것도 있고, 신고를 안 한다는 장점도 있었고, 전투가 일어나도 무장공비가 유리하고 판단했다.

▲ 당시 울진-삼척으로 120명이 침투했다. 어떻게 넘어왔는지?

- 120명이 왔는지 인원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당시 나는 15명이 1개조로 편성한 조장이었는데 8개조가 넘어온 것으로 본다. 원산에서 (1968년)11월2일 모선인 공작선을 타고 넘어왔는데, 처음에는 우리 조 15명이 1개조로 탔는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배를 타고 보니 지하층에 또 다른 1개조 15명이 있었다. 육지에 상륙해 모선이 떠나고 난 다음에 보니 국군이 우리를 발견했다.

그 때 심정은 더 먼저 발견하지 왜 모선이 떠나고 난 다음에 발견하나 하는 마음이었고, 계속 추격을 받으면서 우리의 임무수행이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에서 또 다른 공작원들을 만났는데 (전체)인원수가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 지난 10월 처음 이 곳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 유족들과 처음 대면인가? 어떤 말을 했는지.

- 내가 직접 맞닥뜨린 것은 아니지만 와 보고 싶었다. 가슴이 아팠다. 오늘 처음 유가족들을 만났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가 아니었으면 동료들이 죽인 아이 앞에서 착잡했다. (유족에게) "미안합니다. 건강하게 잘 사십시오" 했다. 내 마음이 그렇다. (이 때 그의 얼굴에는 회한이 서리는 듯 했다)


▲ 자신이 지나온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김익풍 씨. 남파된지 41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 우리사회는 자유의 소중함을 너무도 잘 모르고 있다고 따끔한 충언도 잊지 않았다. ⓒkonas.net



▲ 안보강사로도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당시와 지금의 우리사회 상황은?

- 10여 년 동안 전국을 돌며 반공, 안보교육을 했다. 당시는 남한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투철했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보면 심한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서울 시내가 평양거리인지 어디인지 이북과 비슷한 상황들이 많고, 빨갱이 같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 이승복 사건에 대해 조작된 것이었다는 말이 많았다.

- 말 자체가 되지 않는 한심스런 것이다. 간첩이 가서 어떤 일(말)을 했을 때 어린이가 좋다고 하거나 환영을 했으면 죽이겠느냐? 이북이 좋다고 했다면 절대 죽이지 않는다. 먼저 포섭을 하고자 하지 죽이려 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무언가 싫다고 했으니까 '아, 이것은 우리를 신고할 대상이구나'해서 죽인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 당시 자폭을 생각지는 못했는지?

- 남파되었다가 자폭한 동료들의 가족 부모는 일계급 다 올라간다. 김신조도 만났지만 그 가족은 사형이다. 그게 현실이다. 내가 갈 길도 자폭밖에 없었다. 자폭 못한 이유는 먹지 못하고 쫒겨 다니다 생각이 마비되고 말 정도였다. 권총을 댕겼는데 총이 녹이 슬고 흙이 총구를 메워 결국 자살도 하지 못했다.

▲ 안보의식과 관련해 한마디 한다면?

- 북한 사람은 다 아는데 우리 국민은 적화통일이 되면 과연 남한 사람이 몇 명이나 살게 될 것인가를 잘 모른다. 북한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와 틀리다. 신문이나 TV를 보면 산에 가면 절이 있고, 또 교회도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적화가 되면 남한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국민이 알아야 한다. 이런데 기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자의 노력이 필요하다.

▲ 감사합니다. (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1998년 '이승복 오보 전시회'는 DJ정권의 기획 작품"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이승복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까!
김익풍과 이승복




[코나스 www.konas.net 2009.12.11]


Posted by no1tv


伊藤博文의 孫子 최초, 최후 인터뷰




『회사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천엔짜리가 왔다」고 수근댄답니다. 덕택에 은행 관계 일을 보는 데는 도움이 되지요』

趙甲濟

필자는 1984년 여름 도쿄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손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그해 10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다. 이토히로부미가 安重根의 총탄을 맞아 죽은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 이틀 뒤로 다가온 時点에서 다시 읽어보니 재미 있는 대목이 발견되었다.



박문사(博文寺)가 지금도 있습니까?

초대 통감 이또 히로부미의 손자 이또 도시오씨는 자신이 한국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인을 만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 던진 첫 물음은 『남산에 지금도 박문사(博文寺)가 있습니까?』였다. 박문사는 安重根 의사의 총탄에 숨진 이또를 추모하기 위해 日帝가 남산 기슭에 세웠던 절이다. 그런 절을 한국인들이 아직도 보존하고 있으리라고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를 인터뷰한 며칠 뒤 일본에서 나는 이름난 한국인 교수를 한 분 만났다. 한국에서는 일본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대뜸 『손자가 할아버지의 소행에 대해 사과를 합디까?』라고 물었다. 이또의 혈육까지도 한국인이 그러는 것처럼, 천엔짜리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근대 일본의 큰 인물인 이또를 「원흉」쯤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희망하는 투로 이야기하였다. 지난 7월 나는 아무의 소개도 없이 이또 도시오씨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도쿄 근교 사이다마 현에 있는 간또세끼(關東精機)란 회사의 감사 역인 그는 『오늘 당장 좀 만나 주었으면……』하는 나의 당돌한 부탁을 선선히 받아주었다.

그날 오후 4시께 나는 이또씨의 집으로 갔다. 공교롭게도 그의 집은 도쿄 미나또구 아자부에 있는 한국 대사관 근처 고급 주택가에 있었다. 열려 있는 낮은 대문을 지나 야트막한 흰 저택의 현관문까지 다가가도록 인기척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자, 방금 회사에서 돌아온 듯, 땀을 닦으며 마중 나온 이또 노인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천엔짜리가 왔다」고 수근댄답니다. 덕택에 은행 관계 일을 보는 데는 도움이 되지요』

69세의 이또 도시오씨는 농담부터 했다. 그러면서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얇은 소책자 하나를 내놓았다. 1962년 11월에 어느 법률학자가 쓴 「일본은행권 천엔지폐의 새 도안에 관한 견해」란 글이었다. 내용은 천엔 지폐에 처음으로 天皇이 아닌 역사적 인물(그 전에 지폐에 등장한 인물은 메이지 천황뿐이었다)을 넣기로 했는데, 제1후보로 오른 이또 히로부미가 부적합하다는 일부 여론에 대해 정치가로서의 이또를 변호한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이또 히로부미가 일한합병의 주모자로서 제국주의자였으므로 부적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문치파(文治派)를 대표하여, 日韓합병을 주창하는 군부 등 武斷派에 대항, 하르빈 驛頭에서 쓰러질 때까지 이를 억눌렀던 사람이 바로 이또였다. 日韓합병은 이또의 급사 후 무단파를 견제할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추진, 성립되었던 것이다」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3년부터 천엔 지폐에 이또의 얼굴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일상 생활 속에 가장 가깝게 자리잡고 있는 얼굴이 바로 한국에선 원흉이란 낱말을 앞에 붙이지 않으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또 히로부미인 것이다.

피묻은 와이셔츠는 박물관에

直孫子인 이또 도시오씨는 안경만 벗으면 응접실 벽에 걸려 있는 그의 할아버지 얼굴과 너무나 흡사하다. 벽에 붙은 초상화는 죽음의 길이 된 하르빈 행 열차 안에서 어느 일본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래선지 색감이 아주 암울하다. 이또의 宗家에선 히로부미의 유일한 유품으로 와이셔츠를 하나 보존하고 있었다. 安重根 의사의 총탄이 꿰뚫고 지나간, 구멍 나고 피묻은 흰 와이셔츠였다.

『핏자국이 너무 생생해서 갖고 있기가 좀 뭣했는데, 1953년에 할아버지의 고향인 야마구찌 현 박물관에 줘 버렸습니다』

이또 히로부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히로요시는 親子가 아니다. 이또의 고향 친구이자 평생의 정치적 동지였던 이노우에 가오루(메이지 시대의 외무대신·駐韓 공사 역임)의 아들인데 이또가문에 양자로 입적했었다. 2남 분기찌(文吉)와 3남 신이찌(眞一)가 친자다. 분기찌의 아들이 이또 도시오씨. 이또 분기찌는 韓日합병 때의 일본 수상 가쯔라(桂太郞)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일본 정권을 좌지우지한 것은 조슈번(長州藩‥지금의 야마구찌 현) 출신의 政客과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血緣과 地緣으로 복잡하게 얽힌 강력한 지배층을 형성했다. 이또, 이노우에, 가쯔라의 3각 혈연 관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시모노세끼 주변의 한적한 야마구찌 현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곱 명의 수상이 배출되었다. 이또 히로부미, 야마가다 아리또모, 가쯔라 다로, 데라우찌 마사다께, 다나까 기이찌, 기시 노부스께, 사또 에이사꾸(뒤에 아베가 추가되어 여덟 명).

이들은 韓日합병과 55년 뒤의 國交 정상화에서 모두 主役이었다. 이들 7명은 95년간의 일본 憲政사상 35년간을 통치했다. 조슈번이 메이지維新의 주체 세력이었고 이곳 인물들이 군대와 政界에서 강력한 同鄕人 파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마구찌 현 인맥은 과거에는 한국을 집어삼킨 제국주의자들의 집단이었고 지금은 이른바 「친한파」의 주류가 되고 있다. 이또 도시오씨는 할아버지가 피살된 5년 뒤에 났다. 그는 아버지 분기찌를 통해 할아버지를 알 뿐이었다. 도시오씨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는 하르빈으로 출발하기 전날밤 아들 분기찌를 별장으로 불렀다고 한다.

『어떤 예감이 들었던지 유언 같은 말씀을 했다고 해요. 아버지에게는 정치가가 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그 유언을 받들어 분기찌는 경제계로 진출, 國營인 일본광업사장을 오래했다. 이 회사는 한국에서도 제련소, 금광 등을 갖고 있었다. 도시오씨는 또 다른 소책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나한테 건네준다. 「조선에 여행하여 아버지를 추억하다」는 제목의 기행문. 이또 분기찌가 일본광업사장 시절에 어느 잡지에 발표한 글이라고 한다. 나는 가다가나로 쓰인 이 소책자를 읽어가다가 문득 도시오씨의 意中을 알아차렸다.

원수의 아들끼리 만나다

기행문에 따르면 이또 히로부미의 사망 30주기가 되는 1939년10월에 분기찌는 미나미 총독 시대의 조선에 건너갔다. 서울에서 그는 「우연히」 安重根 의사의 아들 안준생(安俊生)을 만났다. 그들은 남산 박문사에서 「함께」 안중근·이또 두 사람의 혼백을 화해시키는 공양을 했다는 거다. 분기찌는 「안준생 군이 상해에서 왔는데 안중근의 위패를 갖고 박문사에 참례, 추선공양(追善供養‥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초청, 만나게 되었다」고 썼다.

京城日報는 이 에피소드를 절묘한 선전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10월 17일치 경성일보는 「아버지가 범한 죄 때문에 苦鬪의 30년을 보냈던 안준생 군이 생애의 원망(願望)이었던 이또 공에의 사과를 토로한 지금 홍대(鴻大)한 성은에 감읍하면서……은수(恩讐)를 초월한 자식끼리 서로 손을 잡고 과거를 청산, 국가를 위한 봉사를 맹세했다」고 썼다. 이튿날의 경성일보는 두 사람의 교환 공양 장면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佛壇을 향해 왼쪽엔 『공안중근영위(空安重根靈位)』라고 쓰여진 위패, 그 옆에는 이또 公의 사진이 서로 이야기를 하듯 놓여져 있었다. 남작(분기찌)과 안준생은 독경 속에서 다만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다. 남작은 안중근씨의 영령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분향하는 것이었다. 안준생씨는 감격의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보도 자세로 미루어 보아 이 공양 기사를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는 의문스럽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이또 도시오씨가 두 소책자를 보여 준 뜻일 것이다. 나는 그의 할아버지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 도시오씨는 他人의 견해와 문서 자료를 빌어 히로부미를 객관적으로 미리 변호해버린 셈이었다.

10분의 1로 줄어든 저택

도시오씨와의 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바깥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시오씨의 아내는 콜라와 과자를 받쳐와 정중히 꿇어앉아 탁자에 옮겨 놓고는 안방으로 사라진 뒤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는 궁내차관을 지낸 시라네(白根松介)의 막내딸이다. 근대 일본을 기획한 대정치가 이또 히로부미의 宗家 집치고는 좁은 느낌이었다. 대지가 1백20평, 건평은 60평 정도. 히로부미 시대에는 정원만도 1천2백여 평이었다. 분기찌가 귀족의원에다가 작위를 세습, 메이지 원훈(元勳)가문의 대우를 받을 시절엔 이 대저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집은 태평양 전쟁중 폭격으로 불타버렸다. 敗戰 뒤 분기찌의 작위는 없어지고 국가의 특별대우도 사라졌다. 분기찌는 美軍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 公職 추방 명령을 받았으며 1951년 69세로 사망했다.

도시오씨는 거액의 상속세와 재산세를 물게 되었다. 닛산 자동차의 봉급생활자로 일하고 있었던 도시오씨는 집터를 팔아 세금을 냈다. 그 바람에 집터는 할아버지 시대의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손자 도시오씨는 도호꾸(東北)제국대학 법문과를 졸업, 닛산 자동차 회사에 들어갔다가 태평양전쟁 때 징집되어 도쿄 근교의 기구연대(氣球聯隊)에서 중위로 복무중 敗戰을 맞았다. 곧 닛산에 복직, 관리부장까지 승진했다가 산하의 아쯔기 자동차 부품 회사(주)의 상무로 옮겼다. 79년에 퇴직, 지금은 작은 기계공장의 감사 역으로 소일하고 있다.

소심하고 순해 빠진 것 같은 도시오씨에게서 風雲의 정치가 이또 히로부미의 잔영(殘影)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려웠다. 줄어든 저택의 크기만큼 인물의 크기도 3代에 걸쳐 축소돼 온 것 같았다. 이또가 아들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고 유언한 것도 일찍이 아들들의 인물됨을 간파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근대일본의 설계자 이또

현해탄을 바라보는 일본 서해안 야마구찌 현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또 히로부미는 근대 일본 최초의 국제인이었다. 숱한 메이지維新의 主役들을 길러낸 향토의 교육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가르침을 받은 뒤 그는 23세 때 런던으로 유학을 갔다. 이또는 이노우에 가오루 등 네 청년과 함께 런던에 머물면서 서양 문물을 배우던 중 신문을 통해 그들의 향토 조슈번(藩·번은 도꾸가와 막부 시대의 지방 봉건 영주가 다스리던 행정 구역)이 막부의 쇄국정책에 호응,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4개국 연합함대와 決戰을 벌이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또도 한때 과격한 양이파(攘夷派)였다.

영국 유학중 그는 동양과 서양의 힘의 차이를 똑똑히 보았다. 이또와 이노우에는 급히 귀국, 쇄국 정책을 따르는 조슈번을 목숨을 걸고 설득, 연합함대와 강화하도록 했다. 뒤에 조슈번이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 지방)과 함께 도꾸가와 幕府타도의 중심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재빠른 문호개방 덕분이었다. 영국과 친해진 조슈藩은 신식 무기의 구입으로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때 이미 이또는 사이고 다까모리 등 유신 3걸(傑)을 바짝 뒤따르는 젊은 지도자 그룹에 끼여 있었다.

근대 일본사에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이또의 실적은 일본 헌법의 制定이다. 그는 프러시아의 강력한 立憲군주제를 도입한 일본憲法을 초안했다. 1889년에 공포된 이 憲法은 1945년 敗戰 때까지 한 조목도 수정되지 않은 채 지속되었다. 이또는 44세에 일본 최초의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원로들의 총리選考 회의가 난항을 거듭하자 이또의 친구 이노우에는 『총리대신은 적어도 외국電報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외쳤다고 한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즉 국제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는 뜻인데 이또 이외에 그런 인물은 없었던 것이다. 淸日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이또는 수상직에서 물러난 野人의 입장에서 立憲정우회란 新黨을 조직, 정당정치의 전통을 일본에 심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또는 한국의 독립을 원했다』

나와의 대화 중에 이또 도시오씨는 그의 할아버지가 『정치가였지 軍國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하꾸분(필자 주‥그는 히로부미라고 발음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사무라이 출신인 메이지 功臣들과는 달리 平民 출신이었습니다. 군인들과는 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청일, 露日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자신이 붙은 군인들은 군국주의 색채를 드러내게 됐는데 이또 하꾸분은 그런 思潮와는 생리가 맞지 않았습니다. 다만 러시아를 당면의 敵으로 생각하여 南進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을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있어선 군인들과 일치했습니다』

도시오씨가 보여 준 「7인의 재상」(요미우리 신문 야마구찌 지국 펴냄)이란 책은 이또 히로부미가 한국 병합에 반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이또의 조선에 대한 생각을 보자. 그는 『한민족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라를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지금 상황이 나쁜 것은 국민들 때문이 아니라 정치 때문이다. 합병은 매우 성가신 일이다. 한국이 자치할 수 있도록 나는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또의 진보성, 민주적 사고와 행동이 잘 나타나 있다」

이또는 1905년 한국황실 위문특파대사로 서울에 들어와 고종을 협박, 을사보호 조약을 맺었다. 1906년 3월엔 초대 통감에 취임, 조선 통치에선 사실상의 최고 행정관이 됐다. 1907년엔 헤이그 밀사 사건이 나자 高宗 황제에게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거든 차라리 일본에 대해 宣戰을 포고하라』고 공갈, 황제를 양위케 하였다. 일본군을 동원, 의병을 진압·학살한 책임자도 이또였다.

이런 이또를 그의 손자나 학자들은 『韓日 합병에 반대했고』『민주·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으며』『합병을 서두르는 武斷派를 눌렀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또가 韓日합병에 대해서는 가장 온건한 입장이었다는 얘기다. 한국 학자들은 물론 반대다. 이또가 통감이 된 뒤 합병 정책에 소극적이었으며 이 문제로 야마가다 아리또모-가쯔라 라인의 강경파와 대립했음은 한국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또가 합병 자체에 반대,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민대학 한상일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또는 무엇보다도 수완 있는 정치가였다. 한국에서의 통감 경험을 통해 일본은 한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병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조건이 성숙되면 자신이 합병정책을 수행하지 않아도 누군가에 의해서 반드시 합병이 이뤄지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통감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은 우찌다와 같은 대륙낭인의 반대 운동이나 정부내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중히 계산·계획한 결과의 행동이었다」(「일본제국주의의 한 연구」164∼165쪽).

「원흉」과 「흉탄」의 거리

이또는 1909년6월 통감직을 사임했다. 사임 이후 이또는 태도를 표변, 정부의 합병정책을 강력히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또가 하르빈으로 간 것도 韓日합병 뒤 더욱 일본의 위협을 느끼게 된 러시아를 달래려는 목적에서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하기 위해서였다. 노회한 이또는 「韓日합병의 실천자」란 惡役만은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합병이 정치가로서, 먼 뒷날에까지 흠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일본학자들 중에는 『안중근의 총탄이 오히려 합병을 앞당겼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총탄은 역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또를 역시 제대로 맞힌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한국 쪽의 거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니 이또 도시오씨는 合倂에 대한 방법론상의 온건론을 가지고 할아버지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또 도시오씨의 어머니는 韓日합병의 최고 책임자였고 합병에서 강경론자였던 당시 수상 가쯔라의 딸이므로 친할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선 무단파의 代父였던 외할아버지를 비판해야 하는 기묘한 입장에 있다. 어쨌든 이또 히로부미는 메이지維新의 공로자 사이고 다까모리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근대 정치인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또를 원흉으로, 저들은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흉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도시오씨는 퍽 담담하게 이 모순 관계를 처리하였다.

『두 분 모두 조국의 역사에 충실하려다가 그렇게 됐으니 똑같은 애국자지요』

이또가 피살된 날짜는 묘하게도 10월26일(1909년)이다. 매년 이날엔 도쿄 시나가와 구에 있는 무덤 앞에 일본의 쟁쟁한 인물들이 모인다. 야마구찌 현 출신의 著名 인사들이 조직한 「보쪼(防長)구락부」란 향우회가 제사를 주관한다. 이 향우회엔 기시노부스께 전 수상을 비롯, 현대 일본의 政·財界를 주름잡는 인물들이 들어가 있다. 야마구찌 현에선 7명의 총리대신을 비롯, 기라성 같은 군인, 경제인 등이 숱하게 배출됐으나 이 향우회가 매년 제사를 바치는 인물은 두 명-이또 히로부미와 露日전쟁 당시 여순공략을 지휘했던 노기(乃木) 대장뿐이다.

노기 대장은 메이지 천황이 죽자 아내와 함께 자살, 천황을 뒤따른 사람이다. 이또나 노기나 모두 비정상적인 죽음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독 두 사람을 제사하는 것은 깨끗한 死生觀과 결벽의 비극미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취향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또의 아내는 기생 출신이었다. 메이지維新 전에 도망 다니기에 한창 바쁘던 이또를 숨겨준 인연으로 연애결혼했다고 한다.

도시오씨는 『우리 집안의 전통이 두 개 없어졌다』고 농담했다. 사라진 전통은 첫째가 「정치」, 둘째는 「外道」다. 정치가로 출세한 뒤에도 이또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도쿄 신바시의 화류계를 휩쓸고 다녔다. 도시오씨의 아버지 분기지도 이 기질을 받아 퇴근길의 인력거를 아까사까나 신바시의 화류계로 직행시켜 深夜까지 술·여자 속에서 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外道가 부럽기도 한데, 저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다』는 건『그럴 돈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박힌 그 수많은 천엔 지폐도 손자와 특별히 친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老後 생활을 보내고 있는 도시오씨의 두 아들도 평범한 봉급생활자다. 딸은 유명한 화교 실업가 임이문(林伊文)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이로써 이또 가문은 중국과는 화해를 한 것 같은데, 도시오씨는 헤어질 때 『죽기 전에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고 했다.


출 처 조갑제닷컴


[인터넷타임스 http://internettimes.co.kr/2009.10.26]

Posted by no1tv

공자의 말씀을 따르면, 예순이면 이순(耳順)의 경지에 들어서 귀가 순해지고, 일흔이면 종심(從心)이라 하여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했다.

강남구 동 정보화교실 ‘송준의’ 명예강사는 올해로 이미 환갑까지 훌쩍 넘겨버린 66세. 공자가 말씀하신 것과 같이 멀지 않아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만끽할 자격을 가진 나이가 된다. 그런 그가 행정안전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2009년 인터넷 과거시험 서울지역예선에서 당당하게 최우수상을 받고 본선에 진출하여 본선 ‘어르신 정보화제전’에서 동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얻었다.

2007년 어르신 인터넷 과거시험에서도 최우수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송준의 강사는 이미 한글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웬만한 젊은이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전문가로, 올해 강남구 명예강사 자격을 위촉 받아 보조강사로 활동하면서 강사들의 강의효율을 더하고 있다.

“난 처음 스위시(swish)가 뭔지도 몰랐어요. 스위스라고 잘못 알아들었죠.”

1987년 286컴퓨터가 나올 무렵 처음 컴퓨터를 접했다는 송준의 강사는 젊은 시절 전자 중소기업에서 근무해 기계와 친하긴 했지만, 자신이 누굴 가르치는 재능이 있었다는 것에 지금도 놀라워했다.

이러한 수준급의 실력을 얻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구청에서 실시하는 정보화교육 담당 강사들의 특성을 하나하나 살펴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겸손한 대답뿐이었다. 또 강남구 동 정보화교실이 개선해야 될 점에 대한 질문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강남구청의 정보화 교육에 대한 환경적인 요소는 뛰어나다”는 짧은 대답이 전부였다. 지나친 겸손이 아니냐는 추궁에 그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강남구의 수준은 높아요. 배울 수 있는 과목이 다양한데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이에요. 그래서 구민들의 수준차이가 뚜렷한데도 눈높이 교육이 가능한 것 같아요. 강사 분들의 수준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고요.”

“불만은 없어요. 이런 좋은 환경에서 강의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할 뿐입니다.”

전국의 어르신들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분들이 모여 실시되는 ‘어르신 정보화제전’에서 동상을 수상하고도 아직 배움이 부족하다 여기는 송준의 강사의 바람은 소박했다. 그는 현재의 위치에 자만하지도 시간의 흐름에 조급해하지도 않으며, 꿋꿋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해왔다.

이러한 송준의강사의 모습에 강남구 동 정보화교실을 위탁운영하고 있는 지아이티아카데미 담당자도 “전국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한다는 어르신들이 모인 가운데 입상을 했다는 것은 강남구 동 정보화교실(http://educom.gangnam.go.kr, 1544-5220)의 입장에서도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교육지원은 물론 강의도 하실 수 있도록 고려하고 있다”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세월과 함께 늘어나버린 송준의 강사의 배움에 대한 욕심은 11월에 시행 예정인 강남구 구민 정보화 경진대회를 준비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루 불과 몇 시간의 강의지만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보니, 자연스레 대회 준비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투정 어린 불만을 내비치며 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그저 오랫동안 강의를 계속하고 싶어요. 한글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들도요.”

그에게 있어 황혼은 마무리의 의미가 아니라, 또다시 찾아오는 아침과 같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강의를 시작한 것뿐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부랴부랴 쫓기보단 배우는 것에 대한 당당함이 송준의 강사가 가지는 여유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는 이미, 종심(從心)에 가까이 있었다.

(서울=뉴스와이어)

※ 강남구 동 정보화 교실(http://educom.gangnam.go.kr) ☎1544-5220
관련링크 :
  • 강남구 동 정보화교실: http://educom.gangnam.go.kr
    출처: 지아이티아카데미

    홈페이지:
    http://www.greenart.co.kr

    지아이티아카데미 소개: (주)지아이타아카데미는 직장인 및 디자인 전공자 선호도 1위학원 그린컴퓨터아트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언론문의처
    강남구 동 정보화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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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와이어 www.newswire.co.kr 200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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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by no1tv


    “영원한 스승, 훈장의 산실”

    -기획취재! 일하는 실버가 아름답다! -


    서당훈장교육과 한문화운동으로 서울시 각 도서관에서 한자한문 강좌를 개설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전한준(70) 원장(全漢俊: 한국서당훈장교육원, 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 포훈회 회장)을 지난 8월 26일 10시 동대문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전국 훈장들의 연수모임인 포훈회에서 만나 인터뷰하였다.


    - 포훈회(蒲訓會)는 무엇을 하는 모임입니까?

    “전국에서 한자한문교육에 뜻을 가지고 서당훈장자격강좌를 이수한 분들로 현재까지 26기에 걸쳐 배출한 500여 명 중 88명의 회원이 발기하여 조직된 훈장들의 자체 연수모임입니다. 훈장으로서의 품위를 향상시키고 우리의 전통 한문화를 바로 알리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 서당훈장교육에 나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서울숭신, 창신, 수색초등학교장을 역임했고 서울시 강서교육청 장학관을 지낸 교육자입니다. 평소 우리 언어문화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에 교장 재임 시 어린이 운동선수들을 인솔하고 국외경기 차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외국에 와서 느낀 점은 우리 문화의 뿌리가 굳건해야 국제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 빛을 발휘할 수 있음을 확고히 깨달았습니다. 그 후 한자한문교육과 전통 한문화를 가르치기에 노력해 왔습니다. 방과 후 학습과 방학기간에 한자한문교육과 전통 예절교육 등 배출한 교육인원은 2,000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년퇴임 후에는 정독도서관 훈장을 맡아 한자한문강좌와 효행과 예절교육을 지도하는 등 한문화 뿌리 찾기 운동을 위해 8년을 지내왔습니다. 앞으로는 전국각지에서 훈장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인재들을 중점 육성하기 위한 교육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포훈회 연수모임에서는 그 간의 경과보고, 회지배포와 연수와 토론, 한자한문의 국내외 동향과 전망, 그리고 레크리에이션 등으로 이어졌다.

    동대문도서관에서 있은 포훈회 연수모임이 끝난 후에도 원기 왕성하게 활동 중인 전한준 원장을 밀착취재하기 위해 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약칭: 한능원) 집무실까지 따라가 보았다.

    한능원은 동대문도서관에서 도보로 5분도 채 안 되는 지척거리에 있었다. 전한준 한능원 원장이 손수 따라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면서 한자한문교육의 산실임을 입증할 수 있는 집무실의 여러 가지 자료와 강의실 현장 등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강의실 가운데에는 황중자득(況中自得),세우점지(細雨漸漬), 회사후소(會事後素) 등의 족자들이 걸려 있어서 그 뜻을 물어보았다.


    - 강의실 복판에 걸어놓은 족자들은 어떠한 뜻입니까?

    “황중자득(況中自得)이란 상황에 솔선수범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갖추자는 훈장의 행실과 지시적 설득 보다 상황체험을 통한 자기체득이 효과적이라는 교육방법을 뜻하고, 세우점지(細雨漸漬)란 ‘가랑비에도 점점 물이 밴다’는 말로서 벼락치기 공부나 하루치기 시험학습방법 보다는 물이 점점 스며들어 베듯이 점진공부(漸進工夫)에 힘쓰라는 의미이며, 회사후소(會事後素)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에 한다’는 공자의 말씀으로 지식 쌓기보다도 먼저 덕을 닦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영원 스승, 영원한 훈장의 모습을 가르치는 얻음이 있었다.


    문득 전한준 원장은 팔뚝을 걷어 올리고 쑥과 뜸을 뜨고 있어서 물어보았다.


    - 어디 아프신 데가 있으십니까?

    “아파서야 되겠습니까? 아픈 데가 있어서 뜸을 뜨는 것이 아니라 뜸 뜨는 시간이 돼서 뜸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유지는 자신이 미리 알아서 해야지요.”

    전한준 원장의 신장은 실버들의 표준형이랄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통의 키였다. 날씬한 몸매에 속하지만, 연세보다 10년은 족히 젊어 보였다.


    - 젊은이 못지않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건강상 애로를 느끼시거나 특별한 건강관리 비결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원래 학창시절부터 유도 축구 등 가리지 않고 스포츠라면 무척 좋아했습니다. 건강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의욕대로 일할 수 있고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건강 체질을 저에게 물려주신 조상님께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한준 원장과 악수할 때 느낀 것은 내미는 손이 우선 커 다소 별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꽉 힘주어 악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인이 성큼 내미는 큰 손에서 온유한 촉감을 깊게 느낀다고나 할까. 손만 큰 편이 아니고 발도 크다. 신고 다니는 신이 어린이들의 신에 비하면 노인의 신은 항공모함이라고나 할까. 사실 손발이 큰 편이어서 유도 축구 등 운동할 때 유리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집안 내력을 알고 보니 장수가문으로 알려졌다.


    불쑥 바지를 걷어 올리고 소탈하게 보여주시는 전한준 원장의 정강이는 근육 살이 굳게 뭉쳐 있었다. 다소 노인답지 않게 힘 주는 대로 알통이 뒤룩뒤룩 움직여서 기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고 전한준 원장이 웃는 바람에 함께 따라 웃었다.



    전 원장은 “건강해야 합니다. 저는 등촌동 집에서 출근할 때, 청계천 주행코스를 먼저 일주하고 청계광장에서 팔굽혀펴기 100여 번 등 체조를 한 후 사무실에 도착합니다. 사무실에서 우선 땀으로 배여 있는 내복과 추리닝 등을 빨아서 창밖 빨랫줄에 널어 놓습니다. 옷부터 갈아입고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퇴근 시에는 햇볕에 말린 운동복들을 개서 집으로 갖고 갑니다. 다음 날 다시 입고 청계천을 뛰어야 하니까요.”

    전한준 원장의 일상생활에서의 건강관리에 대한 각별함과 운동을 좋아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 현재 하고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즐겁고 보람된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


    우리 문화를 알고 배우려는 모습들에서 우선 기쁨을 느끼고 교육 중에 한자와 고전을 통해 한문화의식을 갖고 세간의 흐름을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동질감, 인간애를 확인하고 나아가 동지애까지 느끼고 있다고 했다. 현재 서당훈장 한자한문지도사 과정을 이수한 자격자들에게는 수료 기념으로 전한준 원장이 직접 1:1 사진촬영을 하고 앨범을 기수별로 손수 제작해 나누어 준다고 하였다. 자상한 성품과 정성을 흠뻑 느껴주는 일이었다.

    “사회에서 구국적 애국심에서 훈장 역할을 열심히 하라고 추억의 기념품으로 사진첩을 편집해 기증하고 있습니다.”

    전한준 원장은 서예, 고전문헌독해, 사진촬영, 그래픽, 작곡 등 두루 통달한 다재다능한 탤랜트형 훈장이었다. 자작곡만도 200여 곡이 되었다.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자작해 기록해 두었다는 작곡파일을 보았을 때 음악성까지 고루 갖춘 다정다감한 교육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 원장께서 현재 활동 중인 교육내용과 공개 프로그램이 있다면 간략히 소개해 주십시오.

    “우리 전통문화를 잃지 않으면서 세계화에 우뚝 설 길은 한글과 병행하여 한자교육을 실시하고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전통고전을 알아서 지피지기(知彼知己)하여야 합니다.”



    “한자한문교육운동을 핵심으로 인성교육인 효행운동, 전통 한문화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천자문(千字文) 사자성어(四字成語) 등 기본적인 한자교육부터 한국명문순례 한국전통문화탐방 고전연구 등의 한자교육과 인성교육의 기본이 되는 예절교육, 자녀의 가정교육 및 학부모 연수 그리고 효행운동을 펼쳐 효행상을 표창하고 있습니다.

    한자성명쓰기운동, 명함에 한글 한자 영문을 같이 표기하여 사용하기 캠페인, 가훈(家訓)갖기 운동, 가훈 휘호 제공하기, 아호(雅號)갖기 운동, 명함에 아호 표기하여 사용하기(숭명운동:崇名運動), 한자바로쓰기 운동(한자성명, 자형 바로쓰기), ‘전통교훈 이야기’ 및 현직교사 비현직 ‘서당훈장양성 직무교육’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까운 공개 프로그램을 소개하자면 9월 2일부터 동대문도서관에서 4기 ‘서당훈장양성 무료교육’이 있으며, 9월 10일부터는 강서도서관에서 1기 ‘서당훈장양성 무료교육’이 시작됩니다. 각기 매주 해당 요일에 오전 오후로 1시간 30분 3시간씩 12주간 강좌가 진행됩니다. 모집은 60세 이상 어르신 우선으로 선착순 30명씩입니다. 수강료는 전액 무료이고 단, 교재비 2만원은 별도입니다. 교육내용은 한자지도사양성 과목 위주이며 우리 문화 바로알기 교양강좌, 그리고 주로 어르신들께서 참가하므로 수지침 침뜸 클리닉 등 건강관리 특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번 강좌도 많이 참가하여 성황이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촌시가 바뀌는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는 이 때, 우리의 고유 전통문화를 굳건히 지키고 뿌리를 가꾸는 전한준 원장은 그의 아호, 청초(靑艸)가 말해주듯 푸른 희망과 의욕 그리고 건강함을 몸소 잃지 않으려는 이 시대에 영원한 스승, 영원한 훈장의 참모습을 던져주고 있었다.



    실버넷뉴스 이상천 기자 house@silvernetnews.com


    [실버넷뉴스
    http://www.silvernetnews.com/ 200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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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훈회(蒲訓會) 창립총회 기념사진 (2009년 8월 19일)




    전한준 포훈회 회장




    수지침 특강



    한능원(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 재단 사옥



    한능원 교육장 입구



    황중자득(況中自得)


    세우점지(細雨漸漬)



    회사후소(繪事後素)




    레크리에이션 특강



    국가공인 한자능력자격검정 현수막


    포훈회 회보



    포훈회 훈장들의 토론 장면




    훈장증과 효행증




    정자관(程子冠)을 쓴 전한준 원장




    전한준 원장이‘훈장양성교육 수료기념’으로 기증한수제품 사진첩




    전한준 원장이 ‘훈장양성교육’ 수료자에게 작호(作號)한아호(雅號)가사진첩 기록에남아 있다

    훈장양성 연수교재





    사자소학 효행한문 암송문(전한준 작곡), 호천망극(전한준 작시작곡)



    국자찬가(진태하 작사, 전한준 작곡)


    강서도서관 ‘제1기 서당훈장자격 무료 강좌’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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