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민족주의', 中 공산당의 새 이데올로기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을 수 있으면 좋은 고양이다'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오는 22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주도한 덩샤오핑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다. 중국 정부는 이날을 맞아 덩의 출생지인 쓰촨(四川)성 광안(廣安)에 대형 동상을 세우는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인다. 중국이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것은 덩의 개혁.개방 정책에서 비롯됐다. 1978년 집권한 덩의 '흑묘백묘론'은 중국 공산당의 현실주의 이데올로기였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돈을 잘 벌 수 있는 체제가 좋은 체제다'라는 그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시장경제체제를 적극 도입했다. 선부론(先富論), 즉 부자들이 앞서가면 나머지는 따라간다는 논리에 따라 개인간 빈부 격차를 인정하는 등 사회주의 경제정책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자본주의 정책을 추진한 셈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의 공장'이라는 말을 듣는 등 욱일 승천하고 있다.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던 것도 이 같은 덩의 개혁.개방 정책과 실용주의 노선 때문이었다.

경제에서의 시장경제 체제 도입과 달리 중국은 정치에서 아직도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일당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시장 경제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민주화의 요구가 분출되자 이를 강경 진압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89년 텐안먼(天安門) 대량학살 사태이다. 중국 공산당은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주장한 국민들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에 대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경제 발전과 대외 개방 등으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퇴색하고 있고 지역.계층 간의 소득 격차 등 사회적 불만이 확산되는 등 부작용이 드러나자 이를 무마할 새로운 통치이념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됐다.

中華라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사회주의의 부작용을 보완...과거의 영광 재현으로 포장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할 수 있는 통치 이념을 창출하는데 고심하던 중국 공산당은 1997년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의 귀속을 계기로 '중화(中華, Middle Kingdom) 민족주의'(중화주의)가 인민들에게 어필하자 이를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삼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중화주의를 항상 역사적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워왔다. 중화주의는 화이(華夷) 사상에서 출발했다. 중원 대륙의 왕조만 문명화한 중화국(中華國)이고, 주변국은 미개한 이적(夷狄)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중국인들은 아편전쟁으로 서구 열강에 국토를 빼앗기는 치욕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덩샤오핑을 승계한 장쩌민(江澤民) 등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중화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이 인민들을 단결시키고 국가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원동력이라는 점을 알게됐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국민들에게 자유 대신 삶의 질을 높이고 민족주의를 고양시킨다는 전략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1997년 홍콩의 주권 귀속에 이어 2008년 하계 올림픽의 베이징 유치, 2010년 엑스포의 상하이 유치 등에 이어 2003년 첫 유인우주선 발사 성공 등으로 중국인들의 민족주의는 최고조에 오르고 있으며, 공산당 일당독재와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생긴 각종 부작용 등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효과를 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특히 공산당이 없었다면 신중국도 없다는 자긍심까지 보이고 있다.

진시황의 영웅화..애국심과 민족주의 부추기는 통치 전략

중국 공산당은 중화 민족주의를 고양시키기 위해 주도 면밀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진시황을 영웅화하는 것이다. 진시황은 쑨원(孫文), 덩샤오핑과 함께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3명 중 한 명이다. 중국인들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이 누리는 경제 발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쑨원은 봉건적인 황제 제도를 없애고 현대중국의 문을 연 선구자라고 꼽으면서 추앙한다. 중국 공산당은 그동안 역대 왕조를 비판하면서 봉건주의 타파를 내세운 바 있다. 이 같은 논리라면 군주인 진시황은 공산당이 배척해야할 과거 잔재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중화 민족주의를 앞세우려면 가장 적절한 인물은 진시황이다. 또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진시황이다. 중국 공산당은 천하를 정복한 진시황을 국민에게 각인시켜 새로운 민족주의를 고양시킨다는 속셈이다.

중국 역대 제왕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인 진시황은 BC 246년 중국을 통일했다. 만약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현재의 중국 대륙은 유럽처럼 여러 국가로 쪼개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중국 천하를 모두 평정한 후 황제에 올랐다. 오늘날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China)도 진(Chin)나라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중국 산시(陜西)성 시안(西安)의 진시황릉에 대한 대대적인 탐사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진시황의 지하 궁전을 발굴하고 있다. 진시황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 작업은 중국 정부의 고도의 정치적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제국의 통일 군주로서 진시황의 업적을 과장하고 미화함으로써 대만을 겨냥한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동시에 과거에 중국이 동북아에서 누렸던 패권주의를 복원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진시황은 바로 중화주의의 상징으로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봉건주의와 전제 지배체제를 부정하는 중국공산당의 이념으로 볼 때 진시황을 부각시키는 것은 이율배반적일 수도 있으나 오히려 국민의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통치 전략인 셈이다.

영화 등 문화와 스포츠도 정치적 이용...눈에 보이지 않는 선전 선동 전략

심지어 진시황의 미화에는 영화도 동원됐다. 진시황의 일대기를 그린 장이모(張藝謨) 감독의 <영웅>은 2002년 12월 20일 개봉된 이후 연일 만원 사례를 이루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자객들이 천하의 안정을 위해 암살을 포기한다는 내용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개인이 희생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중국 공산당이 원하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런 것이다.중국 공산당은 또 스포츠까지도 중화주의에 이용하고 있다. 중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2003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11전 전승을 거두고 우승하자 전 국민이 환호하는 등 열광하기도 했다. 1986년 체코에서 열린 세계 여자배구선수권대회 우승 이후 17년만의 쾌거이기는 하지만 마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인 것처럼 이를 과대 선전했다. 중국 언론들은 이를 대서 특필하기도 했다. 중국 남자 축구가 최근 아시안 컵 결승에서 일본과 맞붙게 되자, 과거 치욕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을 이겨야한다고 선동한 것도 중국 공산당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략이다.

중화주의, 젊은 세대에 어필...대학생들 대거 공산당 입당

중화주의는 젊은 세대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 현재 대학생 등 20~30대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에 유년기를 보냈으며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국민소득이 증가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들 세대는 또한 서구 열강 속에서 겪은 치욕의 역사도 철저히 배웠다. 모든 중국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며, 중국인이 아닌 민족은 모두 야만인이고,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중화주의는 어쩌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들 세대는 과거 진시황이 이룩한 '제국'의 영광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현재 대거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젊은 피'가 되고 있다.

관영 《신화 통신》보도에 따르면 2003년 6월 말 현재 공산당에 입당한 대학생 수는 70여 만 명으로 전체 당원의 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2003년 10월 29일자) 대학생 공산당원 비율은 1990년 1.16 퍼센트에서 13년 만에 무려 6.84 퍼센트 늘어났다. 또 현재 비당원 대학생들 중 약 절반 가량인 395만 명이 입당을 신청했고, 일부 대학은 입당 신청자가 전체의 90퍼센트에 이른다고 전했다. 중국의 공산당원 수는 2002년 말 현재 6,694만 명이고, 이 중 1,488만 명이 35세 미만이다. 여성 당원은 1,191만 명이고, 소수민족은 423만 명이 당원이다. 특히 이들 젊은 세대는 인터넷 등을 통해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퍼뜨리고 있어, '인터넷 민족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각종 사이트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 등을 비판하는 글들을 무수히 올리고 있다. 중국 언론들은 이런 현상이 국가와 민족의 일을 자신을 일로 여기는 사회 발전의 한 단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들의 반미.반일 감정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으며 이를 중화주의와 연결시켜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당은 인민과 중화민족의 선봉대, 黨章도 개정..중국 공산당의 변신

중국 공산당은 2002년 11월 10일 제16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당장(黨章, 당의 헌법) 제1조에 명시된 '당은 노동자계급의 선봉대'라는 표현을 '노동자계급의 선봉대인 동시에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의 선봉대'라고 개정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중화주의를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채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산당은 중국에서 최고의 권력기관이다. 중국 사회에서 입신양명하려면 공산당원이어야 한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원조인 소련의 공산당은 소멸됐으나 중국 공산당은 살아남았다. 중국 공산당은 이처럼 시대의 조류에 맞게 변신을 모색하면서 새로운 ‘왕조’(王朝)를 이끌어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덩샤오핑은 1978년 제11기 3중 전회에서 개혁.개방 조치를 선언했다. 장쩌민은 1993년 제14기 3중 전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이처럼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은 중화 민족주의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것이다.

중국 공산당 새로운 왕조로서 제국 건설...창당 100주년 목표도 설정

제4세대 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는 제16기 3중 전회(2003년 10월 11~14일)에서 균형성장론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개선, 계획경제 잔재 청산, 도시와 농촌, 지역, 계층 간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 안정과 조화 등이다. 이를 위해 중국 공산당은 향후 20년을 내다보고 추진해야 할 경제 개혁의 전반부 10개년 계획의 방향을 확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또 당이 선진 생산력, 선진 문화, 광범위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장쩌민 전 주석의 '3개 대표론'과 '사유재산보호' 조항을 헌법에 삽입할 계획이다. 사유재산보호 조항은 합법적인 재산은 보호를 받는다는 점을 헌법으로 보장, 민간기업과 기업인들의 불안을 덜고 경제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이처럼 사유재산제도까지 보장하고 나선 것은 중화 민족주의에 따른 자신감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역대 왕조는 대략 100~250년을 통치했는데 1945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공산당은 앞으로 상당 기간을 통치할 것이 분명하다.'현대판 天子'인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등은 중국 공산당을 이끌면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2021년 창당 100주년에 1인당 GNP 4,000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은 앞으로 더욱 변신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통치이념은 바로 중화 민족주의가 될 것이며, 중국 공산당은 이를 통해 앞으로도 체제를 더욱 굳건히 해 중국을 세계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 약력
한국일보 모스크바 주재 초대 특파원, 사회부 차장, 국제부 수석 차장, 주간한국 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국제문제 집필 활동을 하고 있음. 저서 <홍군 VS 청군-미국과 중국의 21세기 아시아 패권 쟁탈전>, <네오콘-팍스 아메리카나의 전사들>, <유러화의 출범과 21세기 유럽합중국> 등
[업코리아 http://upkorea.net 2004.08.14]

Posted by no1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