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치열한 愛國戰士 文義煥 선생

비겁하게 도망가는 집권자와 용감하게 달려드는 민중


김동현 조갑제닷컴 리포터


▲ 11월 25일 중앙대 앞에서 이상돈 교수의 각성을 촉구하는 문의환 선생님(현수막 중앙에 빵모자를 쓴분)




[다음인터뷰는 조갑제닷컴 김동현 리포터가 2009년 11월 27일 행한 것입니다]

우파 애국단체의 집회장소는 다양하다. 근사한 호텔의 조찬모임도 있고 강당을 임대해 강연회를 열기도 하고 시청 광장이나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도 한다. 또 10여명이 피켓을 들고 정부 청사나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도 한다. 이런 모임의 단골 참석자인 文義煥(문의환·82)씨는 1927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여든 셋이다.

11월26일 그를 만나려고 연락을 했더니 “오늘은 바쁘니 내일 보자”고 했다. 오전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親北반국가행위자인명사전 편찬 관련 기자회견장‘에 가고 오후엔 金東吉(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月例(월례) 역사강좌를 들으러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미우호협회(회장·박근 前유엔대사) 회원으로 월 1회 저녁식사 모임, 경제인· 대학교수들이 주로 모이는 한강포럼 회원으로 월 1회 조찬모임, 광화문포럼(회장·남시욱) 회원으로 월 1회 조찬모임, 美국무성 관련업무 종사자 모임인 ‘韓美비전협회’ 회원으로 두 달에 한 번 모임, 朴대통령기념사업회 회원으로 3개월에 한 번씩 행사참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출신 퇴직자들의 모임인 安友포럼 회원으로 매월 모임, 매주 월요일 오후엔 조갑제닷컴 週例(주례)강좌에 참석, 국민행동본부의 각종 옥내외 행사 참가, 라이트코리아(회장·봉태홍)의 각종 기자회견 때마다 참석하다 보니, 하루, 한 달, 1년이 금방 지나간다고 한다. “각종 모임의 회비만도 1년에 100만원은 솔찮게 나가는 것 같다”며 웃는다.

文義煥씨에게 왜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느냐 물었더니 곧바로 답이 왔다.“머리수 채워주려고요. 저는 글 쓰는 능력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작고 큰 愛國 모임에 나가서 머리수 채워주고 고함지르고 태극기 흔들고 피켓 들어주는 것이 애국적인 일을 기획한 이들을 돕는 길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국 방법입니다.”

황량한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고함지르는 그의 모습을 간혹 텔레비전에서 본 친구들이 “네 모습이 초라해 보인다…애국운동도 좋지만 좀 점잖게 하라”고 충고할 때마다 그는 맞받아친다고 했다.“야 이 사람아, 당신처럼 방구석에 앉아 애국하는 게 더 창피한 일이야!”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아주머니들이 “선생님, 티비에서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인사할 때 그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가 애국모임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한 계기는 金大中 대통령의 집권 중반기쯤인 2000년대 초였다고 한다.“대학 이사장을 하는 고향 친구를 만났는데, 얘가 심각하게 말하는 거에요. ‘얼마 전 잘 아는 美軍 고위당국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 얘기가 김대중 정부가 하는 정책은 한미관계를 해치기에 딱 알맞은 일을 하는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아 이자들이 나라를 말아먹으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부터 안보 관련 모임에 나가고 글을 읽게 된 겁니다.”

그는 자신의 활동이 애국운동이라는 말에 손사래를 친다.“나는 공부하러 다니는 겁니다. 평생 안보 관련 공직을 맡아 해왔지만 넓게 보지 못했지요.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강연을 듣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또 그걸 옆사람에게 알리는 게 내 보람입니다.”

그는 매일 오후 9시부터 12시까지 서너 시간씩 인터넷을 한다. 조갑제닷컴, 올인코리아, 프리존뉴스, 뉴데일리 등에 들어가 기사를 읽고 마음에 드는 기사는 따로 저장했다가 프린트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영어와 불어를 해독할 줄 아는 그는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르 피가로 등의 인터넷 신문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정보도 얻는다고 한다.

7남매의 막내로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聖都(성도)고급중학교 3학년 때인 1947년에 학교 친구 세 명과 38선을 넘어 越南(월남)했다. 부모 형제들과 이때 헤어져 지금껏 生死(생사)를 모른다. 서울에 와 경희대 前身(전신)인 신흥전문학원에 다니다 6·25를 만난다. 인민군이 서울에 왔을 땐 숨어지냈고 국군이 北進(북진)할 때 고향에 가보려고 황해도 사리원 근방까지 군용 트럭을 타고 갔다가 피란인파를 만나 다시 남하했다.

그해 11월 지금의 미도파백화점 부근을 걷다 전봇대에 붙은 학도병 모집 공고를 보고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육군본부 행정요원으로 배치받아 근무하던 중인 1951년 가을 통역장교 시험을 보고 합격해 통역장교가 되었다.“살기 위해 장교를 지원했습니다. 1951년 들어 전방 高地戰(고지전)전이 심해지자 육군본부 행정병들까지 트럭에 실어 전방으로 보내는데 이러다 죽겠다 싶어 장교시험을 치른 겁니다.”

전쟁이 끝난 뒤 軍에 남은 그는 보병 병과를 받고 1967년까지 복무한 후 소령으로 예편한다. 곧바로 5·16 혁명 뒤 생긴 국가안전보장회(NSC)의 사무국으로 발령받고 1973년까지 戰時(전시) 국가동원(National Mobilization)을 기획 조정하는 업무를 보았다. 국장급인 2급 甲이던 그때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대한방직협회에 부장으로 입사했고 1986년 상무로 정년퇴임했다.

1954년 결혼한 부인 朴慶輔(박경보·76)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둘째아들 부부, 중학생 손주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산다.그는 한 번도 고향 가족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 만났다 더 서러운 이별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는 금강산 관광도 가지 않았다.“내가 왜 김정일 뒷돈 대주는 관광을 합니까?”

김동현 조갑제닷컴 리포터:
http://www.chogabje.com/



▲ 2008년10월 24일통일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나온 문의환 선생(연설자 뒷편에 서있는분)



▲ 법원청사에서 열린 '좌익판사 물러나라'는 기자회견 장에서 연설자 오른편 뒷쪽에 서있는문의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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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o1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