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지 탐방 -2편-




성락원(城樂園)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 등)




성락원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李堈)(1877~1955)이 35년간 살아 별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곳이다.

성락원은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이 있다. 암벽에 행서체로 새긴 ‘쌍류동천’은 성락원의 지맥을 보호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또한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200∼300년 되는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안뜰과 성락원 바깥을 가려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안뜰은 영벽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다. 서쪽 아래 지역에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성락원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 안에 위치한 몇 안 되는 별서정원의 하나로 가치가 크다.


서울부암백석동천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115번지 등)



서울부암동백석동천은 1800년대 도성에 인접하여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사랑채, 안채 등)와 연못 등이 남아 있으며, 인근에 ‘白石洞天’, ‘月巖’ 등의 刻字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정면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백사골에 조성된 洞天의 하나로 주변에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백석동천’이라 불린다고 전하며, ‘백석’이란 중국의 명산인 白石山에서 비롯되었다.




서울 지역의 별서로서는 김흥근 별서인 석파정, 김조순 별서인 옥호정, 심상응의 별서로 알려진 성낙원 등이 남아 있다.


백석동천은 남북을 중심으로 육각정자와 연못이 있고, 약 3.78m 정도의 높은 대지 위에 사랑채와 안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백석동천은 사랑채ㆍ정자 등의 건물지와 연못, 각자바위 등이 잘 남아 있고 마을과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는 등 별서의 구성요소를 두루 갖춘 격조 높은 조원(造園)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전도비(三田渡碑)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289-3)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액(題額)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 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하여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코나스플러스 2010.2.8]


Posted by no1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