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지 탐방 -4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



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1912년에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되어 1915년 되돌려 받아 경복궁(고궁박물관 좌측)에 세워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부도가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기단 구조는 7층을 헤아리는 석재 각부에 조식(彫飾)이 가득 새겨져 있다.

탑신에는 앞뒷면에 문비형과 좌우에 페르시아풍의 영창(窓)을 조각하고, 다시 영락(瓔珞)으로 장식해 놓았다. 옥개는 천개형으로 장막이 드리워지고, 아랫면에 해당하는 위치에 佛ㆍ·보살ㆍ·봉황 등의 조각이 복잡하다. 상륜부도 양화ㆍ복발ㆍ보개ㆍ보주가 층층이 올려져 있다.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은 8각 圓堂의 기본형에서 벗어나 평면 4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墓塔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다.


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산 2-1)



북한산구기리마애불좌상은 북한산 중턱에 있는 승가사 뒤편의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바위면에 홈을 약간 판 다음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으며, 머리 위에는 8각의 머리돌을 끼워 넣어 얼굴을 보호하고 있다.

다소 딱딱해 보이지만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에는 단정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몸은 건장하고 당당하지만 각이 지고 평판적인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어서 경직된 모습이 나타난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으며, 왼팔에 새겨진 옷주름에서는 기하학적인 추상성이 엿보인다. 손은 왼손을 배 부분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는 모습이고,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에는 화사한 연꽃무늬가 겹쳐서 새져져 있다.

강한 느낌의 얼굴, 평면적인 신체 등의 전통적인 양식에 다소 추상성을 가미하면서 웅대하게 변모시킨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마애불좌상으로 높이 평가된다. 전체 높이는 5.94m로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상들보다 다소 둔화되고 형식화된 감이 있으나 신체표현은 균형이 잡혀 있다.


환구단(圜丘壇)
(서울시 중구 소공동 87-1)



환구단은 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天際壇을 가리킨다. 명칭의 한자 표기와 독음을 환구단(圜丘壇)과 원구단(圜丘壇 또는 圓丘壇)으로 혼용하던 것을 2005년 문화재청에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기록된 ‘圜丘壇’으로 한글 표기는 고종이 제사를 지낸 1897년 10월 독립신문을 따라 ‘환구단’으로 정하였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에 와서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터이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코나스플러스 2010.3.8]




Posted by no1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