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정권 시절 빚어진 ‘연천 530GP 사건’, 말못하고 죽어간 국군 장병들의 의문사를 밝혀 달라!” 특검 촉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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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정권 시절 빚어진 ‘연천 530GP 사건’,
말 못하고 죽어간 국군 장병들의 의문사를 밝혀 달라!” 특검 촉구①
“연천 530GP 사건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의한 것이다”
“극악무도한 국기문란사건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연천530GP 피격사건 은폐조작 진상규명 특검 촉구” 기자회견에서
유족들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향하여 큰절을 올리고 있다.
촬영 이상천 리포터 @No1times
‘연천 530GP 사건 진상규명 국민협의회’(이하 국민협의회)는 1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연천530GP 피격사건 은폐조작 진상규명 특검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건은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좌파정권 노무현 정권이 은폐 조작한 국기문란사건”이라 규탄하고, “특검 실시로 그 진실이 밝혀져 말 못하고 죽어간 구천을 헤매는 전사자 8명의 명예를 회복해 원혼을 달래달라!”고 촉구했다.
연천 530GP 사건은 2005년 6월 19일 경기 연천군 중부전선 휴전선 감시초소 중 530GP에서 김동민 일병이 수류탄 1발을 던지고 소총을 난사해 장병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범인으로 지목된 김동민 일병은 현재 고등군사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고 수감 중이다.
국민협의회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친북정권이었던 노무현 정권이 국민정서상 남북 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민감한 사건이라 북한군의 소행을 아군의 소행으로 둔갑시켰다”며, 그 증거로 “사건 당시 고인들의 유품인 전투복을 사고 직후 군 당국에서 자체 소각해 이를 돌려받은 유족이 한 명도 없다는 점, 반납 총기 22점이 부족한 점, 범행 당시 김동민 일병의 목소리를 듣거나 범행 목격자가 전혀 없다는 점, 생존 부상자 4명에게서 총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의혹을 제기하고 “이 사건은 은폐 조작된 국기문란 사건”이라고 규탄했다.
이어 국민협의회는 특검 실시를 요구하며 “연천530GP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 조국에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마친 후 광화문에서 가두행진을 출발해 청와대를 방문, 탄원서를 제출했다.
한편, 국민협의회는 연천530GP피격사건전사자유족회(박영섭), 대한민국‘지킴이’민초모임(정헌치), 대한민국어버이연합(심인섭), 보수국민연합(박찬성), (사)실향민중앙협의회(채병률), 국사모(송영인), 반교척(이계성), 바른사회시민연대(맹천수) 등 40여 시민단체가 참여한 “연천530GP피격사건은폐조작진상규명 특검촉구” 국민운동 연합체다.
다음은 ‘연천 530GP 사건 진상규명 국민협의회’가 발표한 <빨갱이정권에서 은폐 조작된 연천530GP 피격사건의 진상!!> 내용이다.
(2005년 6월 19일 육군 28사단 81연대에서 벌어진)
연천 530GP 사건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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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30GP 사건의 진실
2005년 6월 19일 비무장지대 내 530GP에서 있었던 사건의 진실은 19일 새벽 1시경 소대원 14명이 차단작전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기습적인 북한군의 포격』에 의한 것이다. 이에 유가족들은 국방부의 만행을 낫낫이 밝히고, 눈조차 감지 못하고 사망한 장병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와 증거들로 530GP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1) GP란
▶ 6․25 전쟁 이후 휴전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군사분계선(휴전선,MDL)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2km떨어진 곳에 그은 선을 남방한계선(우리가 흔히 TV말하는 최전방이라고 하는 철책이 있는 곳, GOP)이라 하고, 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그은 선을 북방한계선이라 한다. 이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총 4km를 비무장지대(DMZ)라 하고 휴전 협정에 의거 이곳은 무장을 하고 들어가서는 안 되고, 군인의 출입 또한 엄격히 규제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남․북 모두 이 비무장지대에 GP라고 하는 감시초소 만들어 놓고, 다량의 무기를 보유하며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실정이다. GP는 북한군과의 거리가 1km이내 이고, 북한군의 움직임이 육안으로도 확인 되는 곳이다. 소총의 사정거리가 2km이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서로 사살 할 수 있는 거리이다. 또한 뉴스를 통해서도 많이 들었듯이 사실 이런 총격전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2) 530GP의 위치
▶ 군사분계선이 동서로 반듯하게 그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GP들 중 북한의 초소와 가까운 곳이 있고, 좀 먼 곳이 있다. 그중 530GP는 중부전선에서 북한군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GP이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GP라고 말한다.
2△(사진) 530GP의 위치 뉴스추적(좌) 및 구글어스 위성이미지(우)
2. 온몸으로 진실을 말하다(총상도 수류탄 파편창도 아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억울한 영혼들은 그들의 억울함을 자신들의 온몸에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8명의 시신 중 누구하나 의심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에 사망 장병들이 온몸으로 말하려는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1) 김종명 중위 (K1 소총에 의한 상처가 아니다)
▶ 국내 법의학자들의 인터뷰 거부로 뉴스 추적팀은 일본 최고의 법의학자인 가미야마 시케타로(도쿄 의과대학 명예교수)교수를 통해 여러가지 의문점을 찾아냈다. 김종명 중위의 경우 “목의 상처와 손목의 상처는 K1소총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군 발표대로 라면 체력단력장에서 혼자 사망한 김중위는 김동민이 쏜 K1소총에 의해 사망하였다.
3△(사진 1) 총상이라고 검안한 김종명 중위의 손목상처에 관한 소견내용
4△(사진 2) 총상이라고 검안한 김종명 중위의 목 상처에 관한 소견내용
(2) 박의원 상병 (수류탄에 의한 상처가 아니다.)
▶ 군 발표에 의하면 530GP 내무반에서 수류탄으로 사망한 병사는 박상병 1명 뿐이다. 그 이유는 박상병이 수류탄 파편의 60~70%를 흡수하여 더 큰 피해를 막았다는 것이다. 만약 군발표대로 60~70% 수류탄 파편을 박상병이 모두 흡수했다면 사실 박 상병의 몸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박의원 상병의 몸은 의외로 깨끗하였으며, 수류탄 파편 흔적을 찾기보다는 어떠한 열화(熱火)에 의해 나타나는 화상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5△(사진 3) 60-70%의 수류탄 파편을 흡수했다고 판단하기 힘든박의원 상병의 배(좌)와 등(우)
6△(사진 4) 열화에 의한 화상이 있는 박의원 상병의 팔(좌)과 하체(우)
(3) 범인을 보거나 범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 이 사건의 경우 조작․은폐를 하다보니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많이 있다.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국방부 발표대로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모든 GP원을 사살하고 도주할 목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다면,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할 때 최소한 “XXX들아 다 죽어라”라는 등 감정 섞인 말을 한마디 정도하는 것이 정상인데, 김동민의 경우 범행을 하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범행을 저질렀다. 또한 군 발표대로라면 사건 발생시점부터 GP는 정전상황이었는데도 김일병은 총을 쏜 자세 및 위치, 사망 장병들의 행동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생존한 내무반 인원들도 부상병과 사망병사의 움직임은 너무도 짜 맞춘 듯 생생하게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 정작 김동민 일병의 범행을 목격한 병사는 단 한명도 없다. 이뿐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는 세 가지가 더 있다.
첫 번째는 범행에 쓰였던 K1소총을 후방 초소에서 상황실 복도 앞에 갔다 놓은 병사가 없다는 것이다. 아래의 최초 현장 동영상 캡쳐 사진(사진 24)을 보면 후방초소에 있어야 할 사고 총(정은총 상병의 K1소총, 총번 919482)을 누군가가 상황실 앞 복도에 세워 놓았다. 그런데 생존사병 모두 이 총을 옮기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총이 혼자 범인인 김동민 앞으로 갔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고가 초소(사진 25)의 이강찬 상병 및 임창용 일병은 자신들을 죽이려고 지향 자세로 자신들의 눈 30cm 앞으로 지나가 초소 문을 열고 방아쇠까지 당긴 김동민 일병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한다. 이때 이강찬과 임창용은 창문을 통해 내무반쪽을 바라보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고 했다. 내무반 쪽은 김동민 일병이 올라온 계단을 얘기하는 것이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말이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조작에 가담한 생존병사들이라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한 직접 김동민을 입으로 거론할 수 없지 않겠는가!
(3) 이건욱 상병 (K1 소총에 의한 상처도 수류탄 파편상도 아니다)
▶ 이건욱 상병의 경우 몸 곳곳에 10cm이상의 꿰메 놓은 긴 상처가 보인다. 국방부는 이를 수류탄 파편창이라 검안하였다. 그러나 이 상병의 상처는 유가족들이 추정하는 RPG7에 의한 상처와 유사하다.
7△(사진 5) 이건욱 상병의 팔(좌), 다리 상처(가운데)와 RPG7에 의한 상처(우)
(4) 조정웅 상병 (K1 소총에 의한 상처가 아니다)
▶ 관통거리가 너무 길고 상처 또한 일반적인 K1 상처보다 크다.
8△(사진 6)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간 총알이 오른쪽 종아리 뒤로 나옴(시뮬레이션)
9△(사진 7) 관통상이라고 검안한 조정웅 상병의 옆구리와 종아리에 관한 소견내용
(5) 이태련 상병, 전영철 상병 (K1 소총에 의한 상처가 아니다)
▶ 총상으로 사망했다는 장병 모두 사입구와 사출구가 2cm~10cm로 일반 K1 소총에 의한 총상(0.5mm)보다 그 크기가 5-10배 정도이다. K1과 같은 5.5mm 실탄을 사용하는 북한군에 의해 금강산에서 사망한 박씨도 사입구는 0.5cm였다.
10△(사진 8) 이 상병의 대퇴부 사입구, 3cm (좌), 전상병의 하퇴부 사입구, 2.5cm (우)
11△(사진 9) 일반적인 K1 소총에 의한 사입구
12△(그림 10) 故 박왕자씨 부검결과
(6) 차유철 상병 (K1 소총에 의한 상처도 수류탄 파편상도 아니다)
▶ 차유철 상병의 경우 6.5*5.0cm의 두부 맹관 총상(사입구는 있는데 사출구가 없는 총상)으로 사망하였다고 하였는데 X-ray 어디를 봐도 맹관 된 탄두가 없으며, 수류탄 파편상과 비교해도 확연히 다른 파편들이 무수히 박혀있다.
13△(사진 10) 맹관총상으로 검안된 차 상병의 두부(좌), 두부 x-ray(가운데)와
GOP에서 수류탄으로 사망한 배 일병의 X-ray(우)
(7) 김인창 상병 (K1 소총에 의한 상처가 아니다)
▶ 김인창 상병의 경우 사입구(3.6cm)와 사출구(4.5cm) 모두 옷이 찢겨진 상태인데 K1에 의한 상처에 의해서는 이런 옷 찢김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14△(사진 11) 김인창 상병의 찢겨진 옷과(좌) K1소총에 의한 옷감의 파손(우)
(8) 부상병에서 적출한 파편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수류탄의 파편이 아니다)
▶ 사실 이 사건의 가장 큰 조작 증거는 부상병에서 나온 파편이 국방부에서 발표한 KG14 수류탄의 파편이 아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초기 기자들에게 1000여개의 쇠구슬 파편이라고 보고하였으나, 유족들이 부상병 몸에서 적출한 파편이 쇠구슬이 아님을 지적하자, 현재 GP에서 사용하고 있는 KG14의 수류탄 파편은 사각형이라는 답변을 보낸 봐 있다. 그러나 그것은 2008년 11월 181GP에서 발생한 황 이병의 수류탄 사건으로 우리나라 GP에서 사용하는 KG14의 파편은 쇠구슬임이 국회 국방위원회 임시회의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15△(사진 12) 530GP 부상병사의 몸에서 적출한 파편
16△(사진 13) KG14의 수류탄 외관(좌)과 내부형태(우)
17△(사진 14) KG14수류탄 파편이 쇠구슬임을 확인 할 수 있는 국방위원회 임시 회의록
3. 내무반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사건 현장이 조작되었다).
(1) 깨끗한 내무반과 관물대
▶ 수류탄 1발과 25발의 총을 난사했다고 하기에는 내무반 천정과 관물대가 너무도 깨끗하다.
18△(사진 15) 수류탄이 폭발했다고 하는 내무반(좌)과 직상방의 천정(우)
19△(사진16) 수류탄이 폭발했다고 하는 지점의 관물대(좌) 총기난사방향의 관물대(우)
(2) 옮겨진 운동화와 탄창 (사건현장 조작 단서)
▶ 사건 현장을 조작하는 데 급급하여, 사망한 김종명 중위의 운동화의 위치가 변하였으며, 증거물로 가장 중요했던 범인이 사용했다고 발표한 탄창의 위치 또한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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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사진 17) 체력단련장 바닥에 있던 운동화(좌)가 김 중위 발에 신겨져 있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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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사진 18) 중요한 증거물인 탄창의 좌우가 바뀌어 있음.
(3) 조작된 진술서
▶ 수많은 진술서는 상당부분 조작됐거나 사건과 관련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조작의 증거로 1,2차 진술서의 필체가 확연이 다른 사람이 있다.
24△(사진 19) 필체가 확연히 다른 김모 상병의 1차(위), 2차(아래) 진술서
(4) 일괄 처리되고 소각된 총기, 방독면, 군복
▶ 내무반에서 발생된 일이라면 총기, 방독면, 군복 등은 큰 피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은 일괄적으로 파손된 총기 피 묻은 방독면과 군복을 소각하였으며, 이에 사망 장병 누구도 유품으로 군복을 받지 못했다.
25△(사진 20) 국감시 방독면, 총기, 군복 등을 처리한 것을 시인하는 국방부 관계자
26△(사진 21) 전투복을 모두 소각했다고 말하는 생존병사와 기자의 인터뷰 내용
4. 김동민 일병은 범인이 아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풀리지 않는 부분이 범인이 아닌 김동민이 왜 계속해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진술하는 가 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옛 말처럼 그 속은 알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정황과 증거들로 미루어 짐작해보고자 한다.
(1) 총기, 탄창, 수류탄 손잡이에 범인의 지문이 없다.
▶ 김동민 일병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장갑은 끼지 않은 상태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일병이 사용했다던 수류탄 안전손잡이, 탄창 등 어느 곳에서도 지문이 현출되지 않았다.
27△(사진 22) 2005년 7월5일 국방부과학수사연구소 지문감식결과 감정서
(2) 너무도 이상한 거짓말 탐지기 결과
▶ 유가족들의 요구에 따라 거짓말 탐지기를 국방부 자체적으로 실시하였으나, 검사관의 의견을 보면 “김동민 일병은 꼭 제3자의 입장에서 타인의 행위를 목격한 대로 전달하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음”이라 되어있으며, 검사 외 상황에서도 계호병들과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화하는 등 피검사자인지 의문이 갈 정도로 검사관이 당혹했다고 나와 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타인의 행위를 목격한대로.”. 맞는 말이다. 김동민 일병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고 국방부에서 짜준 시나리오 대로 말을 하니 당연히 이런 검사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8△(사진 23) 김동민 일병의 거짓말 탐지기 보고서(문서번호 거탐 2005-005)
(3) 범인을 보거나 범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 이 사건의 경우 조작․은폐를 하다보니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많이 있다.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국방부 발표대로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모든 GP원을 사살하고 도주할 목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다면,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할 때 최소한 “XXX들아 다 죽어라”라는 등 감정 섞인 말을 한마디 정도하는 것이 정상인데, 김동민의 경우 범행을 하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범행을 저질렀다. 또한 군 발표대로라면 사건 발생시점부터 GP는 정전상황이었는데도 김일병은 총을 쏜 자세 및 위치, 사망 장병들의 행동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생존한 내무반 인원들도 부상병과 사망병사의 움직임은 너무도 짜 맞춘 듯 생생하게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 정작 김동민 일병의 범행을 목격한 병사는 단 한명도 없다. 이뿐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는 세 가지가 더 있다.
첫 번째는 범행에 쓰였던 K1소총을 후방 초소에서 상황실 복도 앞에 갔다 놓은 병사가 없다는 것이다. 아래의 최초 현장 동영상 캡쳐 사진(사진 24)을 보면 후방초소에 있어야 할 사고 총(정은총 상병의 K1소총, 총번 919482)을 누군가가 상황실 앞 복도에 세워 놓았다. 그런데 생존사병 모두 이 총을 옮기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총이 혼자 범인인 김동민 앞으로 갔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고가 초소(사진 25)의 이강찬 상병 및 임창용 일병은 자신들을 죽이려고 지향 자세로 자신들의 눈 30cm 앞으로 지나가 초소 문을 열고 방아쇠까지 당긴 김동민 일병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한다. 이때 이강찬과 임창용은 창문을 통해 내무반쪽을 바라보며 경계를 서고 있었다고 했다. 내무반 쪽은 김동민 일병이 올라온 계단을 얘기하는 것이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말이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조작에 가담한 생존병사들이라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한 직접 김동민을 입으로 거론할 수 없지 않겠는가!
29△(사진 24) 사고 총기가 놓여있는 모습
30△(사진 25) 530GP 고가초소
세 번째는 사고 당시 GP의 정전이다. 군 발표에서 김동민 일병이 상황실에 난사를 한 후 정전이 되었다고 했다. 아래 사진의 흔적이 정전을 유발했다는 상활실의 탄흔이다. 더붙여 사고GP는 평소에도 정전이 자주되는 곳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직접 안전기에 총탄이 박힌 것도 아니고 벽의 두께가 40cm도 넘는 상황실 외벽에 총을 맞았다고 상황실 안에 있는 안전기가 내려가 정전이 되었다는 설명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평소에 자주 정전이 된다는 설명은 궁색하기까지 하다.
그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한 GP가 자주 정전이 되었다면 당연히 수리를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경계등은 생명의 빛과 같기 때문이다.
유가족은 정전 또한 군 당군이 김동민 일병을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하겠다는 병사가 없자, 정전이 되어 보지 못했다는 핑계를 만들어주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이야기로 믿고 있다. 그 이유는 생존병사와 찍은 현장검증 동영상을 보면 더 의구심을 같는다. 유가족이 참여한 현장검증에서 사망 장병의 움직임은 매우 상세히 기억하고 있으면서 내무반 안으로 들어와 총을 난사하는 김동민 일병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31△(그림 26) 정전을 유발했다는 상황실 외부벽의 탄흔
(4) 김동민 일병과 조정웅 상병은 절대 조우 될 수 없다.
32△(사진 27) 체력단련장의 혈흔(좌)와 식당의 혈족흔(우)
33△(사진 28) 조정웅 상병의 이동경로 및 조정웅 상병의 혈족흔
▶ 사진 27, 28을 보면 김종명 중위가 사망한 체력단련장과 조정웅 상병이 사망한 취사장 중간에 있는 5.8m×4.5m 크기의 식당에 슬리퍼에서 피 묻은 좌족흔 6개와 우족흔 10개가 있다. 군은 수사보고서(추송서류)에서 이 피 자국은 조정웅 슬리퍼 자국이며 피는 DNA검사 등에 의해 김종명 중위 것이라고 하였다.
자 그럼 조정웅은 김종명 중위와 같이 체력단련장에 있다가 김종명 중위가 체력단련장 문앞(⑫)에서 김동민의 총에 맞아 체련단련장 안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사진 29)의 Ⓑ에 흘린 피를 좌측 슬리퍼로 한번 찍은 후 옆에 있는 식당 문을 향해 12발자국(좌족흔이 6개 이므로) 움직였다. 그런 후 다시 체력단련장의 Ⓑ로 가 이번에는 우측 슬리퍼로 혈흔을 한번 찍어 식당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20발자국 이상 (우족흔이 10개이므로) 이동하였다. 이 이동 거리가 15m 정도 된다. 또한 슬리퍼 자국을 보면 빨리 이동하려 끌려있는 자국이 아니며, 누가 도장을 찍듯이 조심조심 걸어간 발자국이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김동민 일병이 김종명 중위에게 총을 난사하고 상황실에 난사 한 후 조정웅 상병에게 총을 난사할 때까지 이동한 거리는 약 7m이다. 또한 조정웅 상병의 피발자국은 천천히 조심조심 걸어간 자국이고, 김동민 일병은 상황실 일원을 살해하기 위해 빨리빨리 움직였다. 과연 15m를 조심조심 움직인 조정웅 상병(Ⓑ→Ⓒ→Ⓓ→Ⓑ→Ⓒ→Ⓔ→⑭)과 7m도 안되는 거리를 빨리빨리 움직인 김동민 일병(⑬→⑫)과 어떻게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처럼 군 발표대로 라면 절대 김동민일병과 조정웅 상병은 취사장 앞에서 조우 될 수 없으며, 당연 김동민 일병이 조정웅 상병을 확인 사살까지 했다는 것은 거짓말인 것이다. 그것도 정전된 상황에서 말이다.
(5) 질책 사병 모두 국가 유공자가 되었다.
▶ 군 당국이 범인으로 내세운 김동민 일병의 범행을 유발시켰다고 하는 1차적 책임이 있는 7명의 질책 사병에게 군법에 의한 처벌은 고사하고 모두 조기 전역 혜택과 오히려 슬그머니 국가유공자로 둔갑시켜 죽을 때까지 보상금을 타 먹도록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중대 의혹사건의 입막음의 수단으로 써왔던 정권차원의 전형적인 당근수법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같은 사실은 극비리에 숨겨왔으나 2006년 초에서 6월 사이 3차에 걸쳐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음이 서류상 확인되었다. 그러나 생존 병사 중에는 “부끄러운 국가유공자는 되기 싫다”며 국가유공자 지정을 거부한 병사도 있다.
(6) 대법원의 재판을 포기하였다.
▶ 유가족들은 군사재판이 고등법원까지는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전 대법관 이셨던 정기승 회장의 주선으로 이진우 변호사와 최환변호사(전 서울지검장) 등 변호인단을 만들어 대법원 재판에서 진실을 규명하려하였으나, 김일병 부모의 연락두절로 상고를 하지 못하여 현재 김일병은 대법원 재판은 받지도 못하고, 군사재판인 고등법원의 사형으로 형이 확정된 상태이다. 마지막 기회였던 대법원 상고를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유가족측에서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김일병을 구명하기로 했는데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김일병 어머니 말에 의하면 “(동민이가) 지금이라도 안했다하면 나갈 수 있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변호인단과 관계자들이 김 일병을 면회하려고 수차 시도했지만 교도관들이 “김동민 이가 면회를 거절 한다”는 말만 전해주어 번번이 면회를 하지 못했다.
34△(사진 29) 군사재판의 문제점을 강조하는 최강욱 변호사의 인터뷰
(7) 사건에 책임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
▶ 당시 사고발생 부대의 지휘계통 어느 누구도 문책된 일이 없다. 사건 자체의 비중에 비춰 응당 지휘관이 구속 또는 중징계 됐던 선례(2008년 11월에 있었던 황이병 수류탄 사건의 경우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보직해임)와는 비교되는 처리였다. 사실 이들 지휘계통 상관들은 사건 조작에 직접 가담한 당사자들로 이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사건 직후 6월 17일 철조망을 뚫고 남하한 북한군 리용수 사건과 530GP 사건에 대하여 당시 기무부대장을 비롯하여 5명을 문책하였다. 왜 기무대를 문책했을까? 이번 황이병 사건에서는 지휘관들의 문책은 있었으나, 기무대의 문책은 없었다. 같은 내무반 수류탄 사건을 두고 김일병 사건과는 아주 반대되는 문책을 한 것이다.
35△(사진 30) 2005년 7월 9일 문화일보 기사 일부
5. 차단작전 중 북한군의 기습 포격에 의한 사건이다.
(1) 사건 당일 차단작전을 실시하였다.
▶ 사고가 발생한 530GP를 중심으로, 좌우에 520GP와 531GP가 있다. 이 GP들은 동일 섹터에 있는 GP로 차단작전 시 세 GP가 모두 같이 작전을 실시한다(생존병사 및 전역병사의 증언). 그러나 줄 곳 사건 당일 비무장지대(DMZ)내에서는 아무런 작전도 없다고 주장한 국방부 관계자들은 유가족들의 증거와 국감에서의 여․야 의원들의 질타에 530GP를 뺀 520GP와 531GP는 사건 당일 새벽에 차단작전이 있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530GP도 같이 작전을 나갔다는 증언을 확보하였다.
36△(사진 31) 야간차단작전 실시에 관한 3군사령부 손기화 대령의 답변서
37△(사진 32) 530, 520, 531GP의 동시간대 작전 실시 단서
(2) 생존병사의 증언 확보
▶ 차단작전을 마치고 복귀하는 도중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생존병사 2인의 증언을 확보하였다.
38△(사진 33) 최 하사의 육성증언 중 일부 (2007.12.12, 뉴스추적)
39△(사진 34) 박 일병의 육성증언 중 일부 (2007.12.12, 뉴스추적)
6. 유가족의 주장
2005년 6월19일 중부전선 비무장지내 530GP에서 발생한 사건은 여러 가지 정황, 증거, 증언들로 김동민 일병이 범인이 아님이 확실하다. 또한 530GP의 사건은 차단작전 중 RPG7으로 추정되는 북한군의 기습폭격에 의한 사건으로 더 이상 국가를 위해 전사한 8병의 억울한 넋이 오명을 쓴 채 구천을 맴돌게 할 수 없다.
이에 유가족들은 다시 한번 호소한다. 조작에 가담했던 국방부 관계자 및 생존사병들은 하루빨리 진실을 밝혀 구천을 떠도는 8명의 넋을 위로하고, 자신들의 양심을 되찾기 바란다.
또한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GP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모두 재조사하여 단 한명의 억울한 영혼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기 바란다.
40▶◀ 한 양심 생존병사가 고인 묘역에 있는 메모장에 남긴 글 ▶◀
『조국에 바친 목숨마저 명예를 받들지 못하여 너무 화나고 안타갑습니다』 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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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530GP 사건 진상규명 국민협의회
“좌파정권 시절 빚어진 ‘연천 530GP 사건’,
말 못하고 죽어간 국군 장병들의 의문사를 밝혀 달라!” 특검 촉구①편은
다음 ②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촬영 이상천 리포터 @No1times
찾아가는 뉴스미디어 넘버원타임즈
[2014. 3. 19. www.No1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