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단콩 마을 “음…. 좀 짭조름하지만 생각보다 맛있어요.” 장독에서 4년 묵은 간장을 맛보면서 아이들이 내지르는 소리다. 설마 그 맛을 알까 싶었는데, 곰삭은 듯한 감칠맛을 알아보는 듯하다. 플라스틱 상자가 아닌 항아리에 담긴 된장과 고추장도 신기한 듯 맛본다. 판문점 근처에 있는 통일촌으로 슬로푸드 체험을 하러 온 아이들에게 장독 뚜껑을 열어 보이던 신현례 부녀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된장과 간장은 사람의 정성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낸 보약으로 국산 콩으로만 만든 우리 전통 소스죠. 암과 성인병 예방에 좋은 전통 조미료로, 이걸 먹으면 살도 안 찌고 건강해져요.” 그의 말대로 콩을 발효시켜 만든 전통 조미료이자 단백질 공급원인 된장과 간장은 우리나라 ‘슬로푸드(Slow Food)’의 대표 주자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기치로 내세운 웰빙(참살이) 열풍이 문화로 확산되면서, 건강한 식문화 정착을 위한 운동이다. 최근 경기도에서 슬로푸드 마을로 지정한 파주 통일촌 ‘장단콩 마을’에는 이처럼 콩으로 만든 음식을 체험하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인근 도라전망대에 들렀다 마을 식당에 온 가족은 맷돌을 돌려 콩즙을 담아내 순두부 만드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직접 키운 콩으로 메주를 쑤어 담가서 1년 동안 묵혀 만든 전통 간장으로 간을 한 밑반찬에서부터 콩자반, 된장찌개, 순두부, 콩비지에 이르기까지 한 상 푸짐하게 차려 주는 장단콩 정식은 가장 많이 찾는 이곳의 인기 메뉴. 사실 ‘장단콩 마을’은 지금은 사라져 간 전통 장 담그기를 체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이곳이 유명세를 타게 된 데는 이 지역 재래 품종인 장단콩 덕이 크다. 분단 직전까지 파주가 아닌 장단으로 불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 콩의 재배 역사는 4000년 이상 되며, 국내 최초 장려품종 콩으로 지정됐을 만큼 뛰어나다. “장단콩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껍질이 얇아요. 특히 타 품종에 비해 달고 고소한 맛이 더합니다”라고 신 부녀회장은 말했다. 최근 장단콩 마을은 슬로푸드 마을로 지정돼 콩으로 만든 된장·간장 등과 같은 상품 판매뿐 아니라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파는 웰빙 관광단지를 지향한다. 매년 11월에 열리는 장단콩 축제 때는 콩으로 만든 전통 요리, 퓨전 음식과 함께 두부와 메주의 제조과정도 볼 수 있다. 거기다 분단의 아픔이 서린 제3땅굴, 도라전망대 등 분단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볼거리가 인접해 있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031-953-7600
● 김포 금나루 전통장 수도권 인근 김포에 위치한 또 하나의 100% 국산 콩만을 이용해 전통 장을 담그는 ‘금나루 전통장’. 강화에 맞닿은 김포 내륙의 주민 18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곳은 원래 장맛이 좋기로 유명한 농촌 마을. 입소문을 통해 장맛을 전해들은 경기도 농업기술센터가 창업자금 지원과 컨설팅까지 도와줬고, 장 담그는 기술만 자신 있던 평범한 5명의 시골 아낙네를 어엿한 사업체의 일꾼으로 변신시켰다. 하지만 다른 영농조합 법인에 비해 소규모로 운영되는 이곳은 품질의 저하를 우려해서 한정생산을 하고 있다. 한 번 TV에 소개된 이후에는 문의하는 시청자들이 “장이 없어서 못 팔 거면 왜 TV까지 나와서 홍보를 하느냐”고 항의를 할 정도. 어찌어찌해서 이곳의 장을 맛본 사람은 반드시 찾게 되고 단골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알게 되어 오는 이들만 상대한다. 이곳 대표를 맡고 있는 성정순씨는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고 농한기를 이용해서 장을 담그기 때문에 농가 소득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을뿐더러 100% 품질을 자신하는 장을 만들어 전통 장맛을 이어 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흐뭇하다”며 웃는다. ☎ 031-981-5949 ● 맛있는 장 만들기
맛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성이 여간 들어가지 않는다. 봄에 씨앗을 뿌려, 한여름 땡볕에 땀띠 나도록 콩밭 메어 가을에 수확한 콩을 도리깨로 탈곡하여 입동 무렵 메주를 쑨다. 적당한 정도로 삶아 내 으깨서 사각형으로 만든 메주를 햇빛에서 5~6일간 건조시킨 다음, 짚과 함께 발효실에 넣고 20~25일간 효모균이 잘 자라도록 관리한다. 그리고 나서 메주를 손질해서 정월부터 장을 담그기 시작한다. 장독은 한여름에 구워 낸 걸로 옹기장수의 나이가 홀수일 때 사 놓은 항아리를 쓴다. 장독에 메주와 소금물을 붓고 나면 숯과 붉은 고추, 대추를 넣는다. 숯은 잡균을 멀리하게 하고, 고추는 색깔이 진하게 우러나고 매운맛을 내 달라고, 대추는 달큼한 단맛을 내 달라는 바람을 담고 있다. 장을 담근 뒤 40~50일이 지나면 드디어 맑은 장물을 떠서 달여 간장을 만든다. 간장을 그 해에 모두 소비하는 일은 없으며 남은 것은 차례차례 묵혀 둔다. 오래된 간장일수록 맛이 달달하고 삼삼하고 색깔이 검은데, 이것이 진간장이다. 장을 담그면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햇빛 좋은 날이면 장독 문을 열어 놓았다가 비라도 올라치면 재빨리 닫기를 1년여. 그제야 제대로 된 장맛을 볼 수 있다. 장은 술과 친구처럼 오래 묵을수록 좋다. “요즘 사람들은 오래 묵은 장은 색이 짙다고 싫어해요. 소금에 익숙해져서 국물이 맑은 걸 좋아하지.” 장단콩 마을 아주머니가 아쉬운 기색을 보인다. 장맛은 빠르고, 재간 있는 손놀림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읽어 내는 지혜와 정성, 그리고 인내에 달려 있다. 그리고 다른 변수가 수두룩하다. 말마따나 “지역마다 물맛이 다르고, 손맛이 다르고, 항아리마다 숙성 정도가 다르고, 또 먹는 사람의 입맛도 다르니 참 표준화하기 힘든 것이 장맛”이란다. 예부터 장과 관계된 속담이 흔한데, “집안이 망하려면 장맛부터 변한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이는 집안의 모든 음식맛을 조율하는 장맛을 잃어버리면 식구들이 밥맛을 잃게 될 것이고, 밥맛을 잃으면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생긴 말이 아닐 듯싶다. 글 : 송은희(여행 전문기자), 사진:정귀성(프리랜서 사진가) |